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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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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루의 소풍


BY 로미 2000-07-06

아침 일찍 새미에게 전화를 했다.

새미는 아직 자고 있다고 남편은 말했다.

"엄마 찾고 울진 않았어?"

"잘 놀다 잠 들려니까 울더라,내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었지.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뭐."

"여보,새미 데리고 들어와."

"어머니가 좀 데리고 있고 싶으시대잖아,언제 손녀 재롱 볼 시

간이 있으셨냐.학교 들어가면 그럴 날도 없을 텐데,그냥 둬 보

지 뭐.정 울면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 오시겠대.낮엔 안 울고

잘 놀아."

"어머니가 새미 이뻐서 그러시는 거 아니야, 애 잡지 말고 데리

고 와!"

"무슨 소리야?"

"아무튼 저녁 비행기로 오든지, 아니면 낼 오든지 간에 새미 데

려와."

"알았어,의논해보고. 당신도 좀 홀가분하게 쉬면 좋지 왜 그

래?"

"새미 있어야 돼."

"언제는 혼자 좀 있고 싶다며?"

남편은 내가 아이를 떼 놓지 못해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

다. 껄껄 웃으며,그러마고 했다. 조금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와,어머니가 아쉬워하신다며,월요일 아침비행기로 올테니 새미

데릴러 공항으로 나오라고 했다.

난 새미가 없는 게 두려워졌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며 새미가 옆에 없는 게 얼마나 불안한지

몰랐다. 새로운 사랑을 가지게 된 날 경계해 줄수 있는 건 새

미 밖엔 없었다.


날씨는 그 동안 맑게 개어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며,혼란스러운 내 맘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힘들었다. 그가 장난스런 눈빛으로 내게 연애

하자는 그 말을 던졌을 때, 어째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걸까. 적어도 농담하지 말라고,,,그렇게라도 말했어야 했다.

그 때,전화벨이 울렸다. 심장 속까지 짜릿하게 벨 소리가 파고

드는 것 같았다. 전화기 쪽으로 번개처럼 내달리는 내 자신을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여보세요?"

"저 정준숩니다. 잘 주무셨나요? 신영씨"

"아,네에..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한 잠도 못잔 것 같은 데요?"

"놀리지 마세요."

"우리 애인이 나 땜에 잠도 못자다니,감격스럽군요."

그는 아주 유쾌한 듯 했다. 그 유쾌함에 아무 근심도 없는 듯

나도 따라 유쾌해졌다.

"날씨가 아주 맑아졌군요. 거짓말 처럼."

"그러네요."

"신영씨,준비하고 기다려요. 오늘 내가 아주 멋지게 보낼 계획

을 세웠으니까."

"저,선생님..."

"그럼 주유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큰 길가에 있는. 한시간

이면 충분하죠?"

"저,저기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나는 서성거리며 어떡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그래,오늘 같은 날은 다신 없을 지도 몰라. 그냥,그냥,친구랑

소풍가는 것처럼,그래 그냥...

갑자기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입어보고 화장도

고쳐보고 하다가 겨우 입은 게 청바지랑 티셔츠였다. 가벼운 소

풍처럼,즐거운 놀이처럼,그렇게 보내고 싶었다.


모자를 챙기고 집을 나서다,슈퍼집 여자랑 마주쳤다.

내가 분주히 나서는 걸 보고 반갑게 유리문을 열고 나오며 아는

체를 했다. 가슴이 뜨금했다.

"새미엄마,그렇게 입고 나서니 아가씨 같네. 어딜가요? 새미랑

아저씨는 안 보이네?"

"새민 서울 갔어요 할머니랑. 낼 아빠랑 들어올 꺼예요."

"할머니 오셨다고 했지 참. 벌써 가셨구나. 근데 어딜 가요? 놀

러 가는 거 같은데?"

"네,오랜만에 홀가분하게 혼자니까,그냥 좀 나가 볼려구요."

"다녀와요 그럼."

내가 왜 그녀에게 갑자기 쩔쩔 매는 것처럼 변명을 하는 거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인사를 건네는 것 뿐인데. 생각하

니 어이가 없어졌다. - 난 그런 게 아니야. 저 여자랑은 달라.

맘 속으로 그렇게 되뇌였다.


그는 저 만치 벌써 차를 대고 서 있었다.

흰 폴로티에 청바지,나와 같은 차림이었다. 썬그라스를 낀채 담

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저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새삼 깨

달았다. 가슴이 뻐근해왔다.

"어,그러고 보니 우리 같은 차림이네. 돌아다니다 보면 신혼부

분지 알겠네요?"

"글쎄요. 그렇게 되었군요. 하지만 뭐,이렇게 늙은 신혼부부도

있나요?"

"재혼부부인지 알겠죠 뭐"

그가 그렇게 유쾌한 사람인 줄도 첨 알았다. 아무 생각없이 그

저 하루를 유쾌하게 보내겠다고 난 내게 다짐했다.

"여기 도시락도 있어요.아침 못 먹었죠? 오다가 마트에 들려서

다 사왔답니다. 이건 전문가적 소견인데요,아침에 탄수화물을

먹어야 머리도 잘 돌아가고 건강해 집니다."

"정말 의사선생님 이시네요."

"이래뵈도 제주도에선 명의 아닙니까?"

"글쎄요? 별 불평없는 어린 환자들 상대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

"모르시는 말씀이군요. 환자는 별 불만이 없어도,그 보호자들

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잘 아시면서요?"

"그러네요.진짜"

"근데,선생님 소리 좀 안하면 안 될까요?"

"입에 익어서,그럼 뭐라고 부르죠?"

"준수씨요..."

"그게 잘 될는지,노력해 보죠."

그는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자고 했다. 차귀도 앞까지 가서는

내게 물었다.

"전망대 올라 가 봤어요?"

"아니요."

"날씨가 맑아서 오늘 보기 좋을 텐데."

"사람들이 많지 않겠어요?"

"걱정되시는 구나,여긴 관광객이 별로 없을텐데요."

"그냥 가죠."

그는 몸을 틀어 날 정면으로 바라다 봤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오늘 하루를 내게 맡겨요. 쓸데없는

신경쓰지 말고.."

"그러죠."

그가 바싹 다가오니,무슨 향수 냄새가 났다. 스킨향인지도 몰랐

다. 아무 향수도 뿌리지 않고 나온 게 슬그머니 후회가 됐다.

남편은 스킨조차도 잘 바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게도 향수를 뿌리지 말라고 주문했었다. 그냥 자연스런 내 냄새

가 좋다고 했었다.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오늘 같은 날 향수조

차 잊어 먹은 거 였다.

"그럼 다시 출발해 볼까요. 수목원에 가 봤어요?"

"아니요,수목원이 있었어요?"

"그럼 산이 이렇게 큰데 수목원이 없을라구요?"

"몰랐네요."

"제주에 이름난 관광지만 돌아다녔군요. 오름에도 많이 안 가

봤죠?"

"네,사라봉정도."

"그럼 사라봉에서 낙조를 봤나요?"

"아니요."

"오늘 일정은 다 정해진 거네요,그럼. 이따 사라봉에서 낙조를

봅시다. 제주에서 사라봉의 낙조를 아직 못 봤다니..."

그는 가볍게 휘파람도 불줄 알았다.

"별거 다 하시네요."

"인턴때,너무 힘들었거든요. 모르시죠,인턴들이 얼마나 힘이 드

는 건지. 잠도 제대로 못자고 24시간을 생지옥같이 견뎌냈죠.

그때 배웠지요,어린 환자한테."

"어린 환자요?"

"네 암으로 죽었지만,걔가 저한테 오히려 그러더군요. 선생님,

힘들땐 휘파람을 부세요,라고."

"맘 아프셨겠어요."

"그게 직업인걸요.오히려 많은 걸 배우기도 하죠."

그의 옆모습을 보니 콧날이 참 오똑해 보였다. 아주 잘 생긴 얼

굴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다시 보니 잘 생긴 거 같았다.

"내 얼굴을 보면서 이 사람 잘 생겼구나,그러고 있죠?"

"네?"

"사랑으로 보면 누구나 미남 미녀인거 몰라요?"

"미녀와 야수,개구리 왕자 이런거요?"

"어,너무하네.아무리 그래도 야수나 개구리는 아닌데,보통은 되

지 않나요?"

"정감있게 생기신 거 같아요."

"못 생겼단 말이죠? 대개 못 생긴 사람한테 성격좋게 생겼다고

하잖아요?"

"선생님도 어제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편하게 생겼다고?"

"자신이 이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컴플렉스죠."

"그럼 제가 이쁜가요?"

"경호씨한테 물어봤더니,신영씨 첨에 보고 한 눈에 반했다고 하

더군요. 자기 한테로 걸어오는데 심장에 뭐가 찔리는 거 같았다

던데요?"

갑자기 남편 얘기가 나오자 어색했다. 그?O던가,남편은 한 번

도 내게 그런 얘길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

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수목원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가 봤던 수목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 였다.남부지방답

게 활엽수들이 쭉 늘어선 길이 비교적 조용하고 넓은 곳이었다.

"참 좋네요."

"저기 저 쪽으로 한 바퀴 돌까요? 약수터도 있거든요."

이렇게 울창한 나무 숲 사이로 그와 단 둘이 걷고 있자니,20살

시절 첫 사랑을 만나고 있는 거 같았다.

"제주엔 왜 내려오신 거예요? 여기 고향도 아니시잖아요?"

"도망 온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보였다. 거길 걸터 앉으며 그는 말했다.

"공부하느라 연예조차 변변히 못 해 봤다면 믿을 껍니까? 그런

데 사실입니다. 레지던트가 되고 나서 선이 들어오기 시작하더

군요. 야망도 있었지요. 물론 집이 가난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 집도 살 만큼은 되었지만,성공하고 싶었지요. 사실 성적

도 우수했지만,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 된 건 아니었지요. 아내

를 소개받고 보니, 제 아낸 미스코리아에도 출전했을 만큼 미모

였고,장인은 돈도 무척 많은 사람이었지요.

병원을 차려주겠다고 하더군요. 더 바랄께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병원을 차려서 원장이 되고 보니,전 그 집 머슴에 불과

했던 겁니다. 이름만 원장이었지,병원 관리는 다 처가집 사람들

이 했지요.아내는 날 위해 찌개를 끓여주고 셔츠를 다려주는 그

런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또 아픈 아이들을 안고 밤새워 간호

하는 그런 여잔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고 결론 내렸지요. 처갓집 그늘에서 벗어나 아내하고도 다시 시

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선배 소개로 제주엘 왔죠. 제 힘

으로 해 볼려구요.

집에서도 그걸 바라셨죠. 손주들 얼굴 한 번 보기가 너무 힘드

셨거든요. 아내는 서울생활을 청산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

서 주말 부부가 된 겁니다."

"부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신 건 아닐까요. 이쁜데 뭐 용서

안될께 있나요?"

좀 심각해진 분위기를 바꿔 본다고 이렇게 말해 버렸다. 그는

웃으며 내 말에 대답했다.

"신영씨가 새미를 데리고 처음 병원에 왔을 때,밤새운 피로가

역력한데도 자기 자신은 그냥 둔채 아이만 걱정하는 모습 참 아

름다웠습니다. 물론 그런 엄마들 무척 많이 보지만 유독 신영씨

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제발 잊어주세요. 츄리닝 바람으로 세수도 못했었는데요?"

"그래요?그 정도였는진 몰랐네요"

그가 짧게 웃었다. 그러나 난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선생님은,그러면 절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거지요."

"왜요? 그냥 편하게 얘길 나누는 것 뿐인데요."

"선생님은 그러셔도 제 맘이 흔들리니까요."


일어서서 약수터 쪽으로 걸었다.

하루를 그저 아름답게 즐기고 그 추억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겠다

고 생각했었지만 그리 쉬운게 아니었음을 알 것 같았다.

약수터에 이르자 그가 먼저 물을 마시고나서 마시던 작은 바가지

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물을 쏟았다. 그리

고 다시 떠서 마셨다. 날 가만히 지켜보던 그의 눈빛이 흔들렸

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설핏하게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