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새미에게 전화를 했다.
새미는 아직 자고 있다고 남편은 말했다.
"엄마 찾고 울진 않았어?"
"잘 놀다 잠 들려니까 울더라,내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었지.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뭐."
"여보,새미 데리고 들어와."
"어머니가 좀 데리고 있고 싶으시대잖아,언제 손녀 재롱 볼 시
간이 있으셨냐.학교 들어가면 그럴 날도 없을 텐데,그냥 둬 보
지 뭐.정 울면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 오시겠대.낮엔 안 울고
잘 놀아."
"어머니가 새미 이뻐서 그러시는 거 아니야, 애 잡지 말고 데리
고 와!"
"무슨 소리야?"
"아무튼 저녁 비행기로 오든지, 아니면 낼 오든지 간에 새미 데
려와."
"알았어,의논해보고. 당신도 좀 홀가분하게 쉬면 좋지 왜 그
래?"
"새미 있어야 돼."
"언제는 혼자 좀 있고 싶다며?"
남편은 내가 아이를 떼 놓지 못해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
다. 껄껄 웃으며,그러마고 했다. 조금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와,어머니가 아쉬워하신다며,월요일 아침비행기로 올테니 새미
데릴러 공항으로 나오라고 했다.
난 새미가 없는 게 두려워졌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며 새미가 옆에 없는 게 얼마나 불안한지
몰랐다. 새로운 사랑을 가지게 된 날 경계해 줄수 있는 건 새
미 밖엔 없었다.
날씨는 그 동안 맑게 개어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며,혼란스러운 내 맘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힘들었다. 그가 장난스런 눈빛으로 내게 연애
하자는 그 말을 던졌을 때, 어째서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걸까. 적어도 농담하지 말라고,,,그렇게라도 말했어야 했다.
그 때,전화벨이 울렸다. 심장 속까지 짜릿하게 벨 소리가 파고
드는 것 같았다. 전화기 쪽으로 번개처럼 내달리는 내 자신을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여보세요?"
"저 정준숩니다. 잘 주무셨나요? 신영씨"
"아,네에..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한 잠도 못잔 것 같은 데요?"
"놀리지 마세요."
"우리 애인이 나 땜에 잠도 못자다니,감격스럽군요."
그는 아주 유쾌한 듯 했다. 그 유쾌함에 아무 근심도 없는 듯
나도 따라 유쾌해졌다.
"날씨가 아주 맑아졌군요. 거짓말 처럼."
"그러네요."
"신영씨,준비하고 기다려요. 오늘 내가 아주 멋지게 보낼 계획
을 세웠으니까."
"저,선생님..."
"그럼 주유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큰 길가에 있는. 한시간
이면 충분하죠?"
"저,저기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나는 서성거리며 어떡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그래,오늘 같은 날은 다신 없을 지도 몰라. 그냥,그냥,친구랑
소풍가는 것처럼,그래 그냥...
갑자기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입어보고 화장도
고쳐보고 하다가 겨우 입은 게 청바지랑 티셔츠였다. 가벼운 소
풍처럼,즐거운 놀이처럼,그렇게 보내고 싶었다.
모자를 챙기고 집을 나서다,슈퍼집 여자랑 마주쳤다.
내가 분주히 나서는 걸 보고 반갑게 유리문을 열고 나오며 아는
체를 했다. 가슴이 뜨금했다.
"새미엄마,그렇게 입고 나서니 아가씨 같네. 어딜가요? 새미랑
아저씨는 안 보이네?"
"새민 서울 갔어요 할머니랑. 낼 아빠랑 들어올 꺼예요."
"할머니 오셨다고 했지 참. 벌써 가셨구나. 근데 어딜 가요? 놀
러 가는 거 같은데?"
"네,오랜만에 홀가분하게 혼자니까,그냥 좀 나가 볼려구요."
"다녀와요 그럼."
내가 왜 그녀에게 갑자기 쩔쩔 매는 것처럼 변명을 하는 거지.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인사를 건네는 것 뿐인데. 생각하
니 어이가 없어졌다. - 난 그런 게 아니야. 저 여자랑은 달라.
맘 속으로 그렇게 되뇌였다.
그는 저 만치 벌써 차를 대고 서 있었다.
흰 폴로티에 청바지,나와 같은 차림이었다. 썬그라스를 낀채 담
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저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새삼 깨
달았다. 가슴이 뻐근해왔다.
"어,그러고 보니 우리 같은 차림이네. 돌아다니다 보면 신혼부
분지 알겠네요?"
"글쎄요. 그렇게 되었군요. 하지만 뭐,이렇게 늙은 신혼부부도
있나요?"
"재혼부부인지 알겠죠 뭐"
그가 그렇게 유쾌한 사람인 줄도 첨 알았다. 아무 생각없이 그
저 하루를 유쾌하게 보내겠다고 난 내게 다짐했다.
"여기 도시락도 있어요.아침 못 먹었죠? 오다가 마트에 들려서
다 사왔답니다. 이건 전문가적 소견인데요,아침에 탄수화물을
먹어야 머리도 잘 돌아가고 건강해 집니다."
"정말 의사선생님 이시네요."
"이래뵈도 제주도에선 명의 아닙니까?"
"글쎄요? 별 불평없는 어린 환자들 상대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
"모르시는 말씀이군요. 환자는 별 불만이 없어도,그 보호자들
이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잘 아시면서요?"
"그러네요.진짜"
"근데,선생님 소리 좀 안하면 안 될까요?"
"입에 익어서,그럼 뭐라고 부르죠?"
"준수씨요..."
"그게 잘 될는지,노력해 보죠."
그는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자고 했다. 차귀도 앞까지 가서는
내게 물었다.
"전망대 올라 가 봤어요?"
"아니요."
"날씨가 맑아서 오늘 보기 좋을 텐데."
"사람들이 많지 않겠어요?"
"걱정되시는 구나,여긴 관광객이 별로 없을텐데요."
"그냥 가죠."
그는 몸을 틀어 날 정면으로 바라다 봤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오늘 하루를 내게 맡겨요. 쓸데없는
신경쓰지 말고.."
"그러죠."
그가 바싹 다가오니,무슨 향수 냄새가 났다. 스킨향인지도 몰랐
다. 아무 향수도 뿌리지 않고 나온 게 슬그머니 후회가 됐다.
남편은 스킨조차도 잘 바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게도 향수를 뿌리지 말라고 주문했었다. 그냥 자연스런 내 냄새
가 좋다고 했었다.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오늘 같은 날 향수조
차 잊어 먹은 거 였다.
"그럼 다시 출발해 볼까요. 수목원에 가 봤어요?"
"아니요,수목원이 있었어요?"
"그럼 산이 이렇게 큰데 수목원이 없을라구요?"
"몰랐네요."
"제주에 이름난 관광지만 돌아다녔군요. 오름에도 많이 안 가
봤죠?"
"네,사라봉정도."
"그럼 사라봉에서 낙조를 봤나요?"
"아니요."
"오늘 일정은 다 정해진 거네요,그럼. 이따 사라봉에서 낙조를
봅시다. 제주에서 사라봉의 낙조를 아직 못 봤다니..."
그는 가볍게 휘파람도 불줄 알았다.
"별거 다 하시네요."
"인턴때,너무 힘들었거든요. 모르시죠,인턴들이 얼마나 힘이 드
는 건지. 잠도 제대로 못자고 24시간을 생지옥같이 견뎌냈죠.
그때 배웠지요,어린 환자한테."
"어린 환자요?"
"네 암으로 죽었지만,걔가 저한테 오히려 그러더군요. 선생님,
힘들땐 휘파람을 부세요,라고."
"맘 아프셨겠어요."
"그게 직업인걸요.오히려 많은 걸 배우기도 하죠."
그의 옆모습을 보니 콧날이 참 오똑해 보였다. 아주 잘 생긴 얼
굴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다시 보니 잘 생긴 거 같았다.
"내 얼굴을 보면서 이 사람 잘 생겼구나,그러고 있죠?"
"네?"
"사랑으로 보면 누구나 미남 미녀인거 몰라요?"
"미녀와 야수,개구리 왕자 이런거요?"
"어,너무하네.아무리 그래도 야수나 개구리는 아닌데,보통은 되
지 않나요?"
"정감있게 생기신 거 같아요."
"못 생겼단 말이죠? 대개 못 생긴 사람한테 성격좋게 생겼다고
하잖아요?"
"선생님도 어제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편하게 생겼다고?"
"자신이 이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컴플렉스죠."
"그럼 제가 이쁜가요?"
"경호씨한테 물어봤더니,신영씨 첨에 보고 한 눈에 반했다고 하
더군요. 자기 한테로 걸어오는데 심장에 뭐가 찔리는 거 같았다
던데요?"
갑자기 남편 얘기가 나오자 어색했다. 그?O던가,남편은 한 번
도 내게 그런 얘길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
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수목원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가 봤던 수목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 였다.남부지방답
게 활엽수들이 쭉 늘어선 길이 비교적 조용하고 넓은 곳이었다.
"참 좋네요."
"저기 저 쪽으로 한 바퀴 돌까요? 약수터도 있거든요."
이렇게 울창한 나무 숲 사이로 그와 단 둘이 걷고 있자니,20살
시절 첫 사랑을 만나고 있는 거 같았다.
"제주엔 왜 내려오신 거예요? 여기 고향도 아니시잖아요?"
"도망 온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보였다. 거길 걸터 앉으며 그는 말했다.
"공부하느라 연예조차 변변히 못 해 봤다면 믿을 껍니까? 그런
데 사실입니다. 레지던트가 되고 나서 선이 들어오기 시작하더
군요. 야망도 있었지요. 물론 집이 가난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 집도 살 만큼은 되었지만,성공하고 싶었지요. 사실 성적
도 우수했지만,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 된 건 아니었지요. 아내
를 소개받고 보니, 제 아낸 미스코리아에도 출전했을 만큼 미모
였고,장인은 돈도 무척 많은 사람이었지요.
병원을 차려주겠다고 하더군요. 더 바랄께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병원을 차려서 원장이 되고 보니,전 그 집 머슴에 불과
했던 겁니다. 이름만 원장이었지,병원 관리는 다 처가집 사람들
이 했지요.아내는 날 위해 찌개를 끓여주고 셔츠를 다려주는 그
런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또 아픈 아이들을 안고 밤새워 간호
하는 그런 여잔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고 결론 내렸지요. 처갓집 그늘에서 벗어나 아내하고도 다시 시
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선배 소개로 제주엘 왔죠. 제 힘
으로 해 볼려구요.
집에서도 그걸 바라셨죠. 손주들 얼굴 한 번 보기가 너무 힘드
셨거든요. 아내는 서울생활을 청산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
서 주말 부부가 된 겁니다."
"부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신 건 아닐까요. 이쁜데 뭐 용서
안될께 있나요?"
좀 심각해진 분위기를 바꿔 본다고 이렇게 말해 버렸다. 그는
웃으며 내 말에 대답했다.
"신영씨가 새미를 데리고 처음 병원에 왔을 때,밤새운 피로가
역력한데도 자기 자신은 그냥 둔채 아이만 걱정하는 모습 참 아
름다웠습니다. 물론 그런 엄마들 무척 많이 보지만 유독 신영씨
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제발 잊어주세요. 츄리닝 바람으로 세수도 못했었는데요?"
"그래요?그 정도였는진 몰랐네요"
그가 짧게 웃었다. 그러나 난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선생님은,그러면 절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거지요."
"왜요? 그냥 편하게 얘길 나누는 것 뿐인데요."
"선생님은 그러셔도 제 맘이 흔들리니까요."
일어서서 약수터 쪽으로 걸었다.
하루를 그저 아름답게 즐기고 그 추억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겠다
고 생각했었지만 그리 쉬운게 아니었음을 알 것 같았다.
약수터에 이르자 그가 먼저 물을 마시고나서 마시던 작은 바가지
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물을 쏟았다. 그리
고 다시 떠서 마셨다. 날 가만히 지켜보던 그의 눈빛이 흔들렸
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설핏하게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