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상쾌하고 싱그러웠다.
딸아이와 나는 눈빛만 마주쳐도 배시시 웃고 있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며 전날의 상흔을 말끔히 날려 보냈다.
그리고, 가속페달을 밟듯 급속도로 예전의 모습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속초의 하늘과 바다가 만들어 낸 신화였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는 그여자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녹초가 된 몸으로 그냥 침대에 널부러지고 싶었지만 나는 또 어느새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여자는 예의 그 단정한 옷차림과 성의 있는 미소로 나를 맞이 했다.
그 여유로움이 승자의 것처럼 보였던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나의 자격지심이었다.
---이민을 가자고 제의한 건 저였습니다.
선생님이 괴로워 하시는 걸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고,
어쨌든 선생님과 제가 인정 받으며 살 수는 없겠다 싶었지요.
어쩌면 저희는 도망을 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벤쿠버는 제가 생활의 근거지를 두고 살아갈 만한 기반이 어느정도 되어 있는 곳이예요.
언니와 형부도 계시고 지인들도 몇 명 있고....
생판 낯선 곳은 아니니까 제희 걱정 너무 마세요...
걱정이라....이 여자가 지금 대체 누굴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단호하고 야무진 그여자 앞에서 나는 단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커피 한모금을 마신 후 여자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결례인 줄 알면서도 제가 또 뵙자고 한 건 마지막으로 한번 더 사모님께 사죄드리고 싶어서예요.
이런말 조차 가식적일 수 밖에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제 진심이 닿길 바라는 심정일 뿐입니다.
제희는...저는 아이를 뱃속에서만 몇 번을 죽였던 자격없는 여자지만....성심을 다해서 키울 꺼예요.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이상으로 뒷바라지 할껍니다.
그 눈빛 속의 진심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충분히 내 가슴에 와닿은 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여자가 내미는 손 덥썩 잡고 어루만져 줄 도량은 없었으나, 그 진정성에 침을 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여자를 처음 만나던 날 참담했던 패배감의 실체는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여자가 조금만 더 통속적이었다면, 조금만 더 뻔뻔하고 몰상식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덜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비참하지 않으면 남편이나 제희, 또다른 누군가가 비참해졌을 현실의 모순이었다.
나는 내 딸아이가 희생양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여자에게 고마워 해야 할 충분한 명분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치사하게도 나는
새끼를 잉태하지 못하는 암컷의 불행 앞에서 조금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정현의 전화를 받은 건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다. 집앞이라고 했다.
골목 어귀에 서있는 그의 흰색 소나타를 보는 순간 나는 느닷없이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영선씨 어차피 잠못이룰 밤이잖아....그래서 내가 왔어....
그의 한마디에 나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평상심을 잃고 서성이던 내게 한 남자의 존재가 이토록 큰 위력이 되리라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놀라워 하면서도 이밤 나는 한마리 상처입은 새로 돌아가 온전히 위로받고 싶어지는 간절한 심정이었다.
가련한 여심을 실은 차는 조정경기장을 지나 북한강변을 따라 바람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달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미쳐버릴지도 모를 마지막 밤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날카로운 칼끝을 나는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가혹한 그 칼끝에서 정말이지 다시는 피흘리고 싶지 않았다.
그 피흘림을 막으려고 내게로 달려와준 남자.
잠못 이룰 한 여자의 밤을 위해 사심없이 달려와준 남자.
그건 고마움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부끄러웠지만,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이는 것만이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이기도 했다.
---우리 가게로 불쑥 영선씨가 들어오던 날,
나는 그렇게 회한을 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건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오래전 내 모습이었구요.
난 말예요...평생 단 한번 밖에 사랑할 수 없는 가슴을 가진 남자인 줄 알았어요.
내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자가 마치 장난치듯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때,
나는 두번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죠.
유행가 가사처럼, 떠나는 뒷모습에 행복을 빌어주마 하면서도
그 결혼이 실패로 끝나는 비열한 상상 끝에 다시 내게 돌아와주길 바란 적도 많았구요.
그런데 영화처럼 되길 바라는 사람에게 삶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지극히 현실성을 원하는 사람에게 삶은 때로 영화처럼 되버리네요.
지금의 나와 영선씨 처럼 말예요....
씩씩한 웃음을 보여주던 정현을 배웅하고 나는 잠든 딸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오래도록 그모습을 음미했다.
도톰한 콧날에서 붉은 입술로 손가락을 타고 넘어가는 그 수려한 곡선 앞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행여라도 눈물이 아이를 적실까봐 엉덩이를 길게 뺀 어색한 자세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딸의 체온을 깊이 깊이 아로새겼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내게 해주던 정현의 말을 상기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시작과 끝은 맞닿아 있는 거라고 했다.
아주 찰나처럼 흘러갈 세월의 어느 끝에
이국의 정취를 한아름 안고 내앞에 설 멋진 딸을 상상하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의 말을 믿고 싶어졌다.
조심스럽게 솟아오르기 시작한 사랑의 싹이었다.
<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