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에 있는 산업체 학교에 자리가 나서 떠나게 되었을 때,정
말 모든게 자연스럽게 마무리 될 수 있는 걸 다행이라고 여겼
다.
대학원은,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더 세월
이 지난 후에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어지면 그 때 할 수도 있다
고 마음 먹었다.
꼭 떠나는 것만이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태경은 나를 나무랐지
만,그러나 이 모든 고리를 끊는 방법은 그 길 밖엔 없다고 생각
했다.
나를 찾아서,그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서 떠날 수 있는 계기가
이런 식으로 마련된 것은 너무나도 행운이었다.
"나도 교사자격증 하나 따 둘 걸 그?O지?"
구미에 계시던 유정의 아버지가 내게 자릴 알아봐주신 거였고,
마침 다행히도 자리가 났었다.
"그러게 공부 좀 하지..하지만 임용고시 보지 않고,이렇게 자리
가 나서 너한테 너무 고맙다."
"근데,정우씬 알아? 그리고 성진인?"
"이제,말해야지..."
나는 쓸쓸히 그러나 담담하게 말했다.
정우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무슨 일이냐며 정우는 기뻐했다.비록 하루동안 떠나는 여행이라
도 정우는 그 동안 그렇게도 바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 선배님이?"
"그냥 너랑 기차타고 춘천엘 가고 싶어"
"조오치.닭갈비도 뜯고 공지천에 이디오피안가..거기 카페도 가
보고,,,"
"그래"
지금 생각해 봐도 정우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오빠
처럼 날 보살펴주려고 애썼다. 태경과는 또다른 우정만으로 내
게 간직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훗날에도 나는 정
우에게 오래도록 미안했었다.
공지천에 카페에 자릴 잡고 앉자 정우는 내게 물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그래,,.있다가 갈 때 할려고 했었는데..."
"뭔데?"
"정우야,나 보내줘."
"괜찮다고 했잖아."
"정우야,미안하지만 난 갈꺼야"
"어디로?"
"지방 학교에 자리가 났어."
"날 피해서 가는 거라고? 그렇게 내가 부담스러워?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옆에 있는데도?"
"정우야 ~ 난 너에게로 갈 수가 없어. 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오
는 건지 아직 모르겠지만,이건 또 알아. 내 친구가 한 말인데,
아닌건 아닌거야."
"널 아끼고 있어. 진작에 그?O어야 했는데,미안하다.정말로."
"그 자식을 피해서 간단 말이지 그럼?"
"아니,날 찾아서 가는 거야"
"근사하게 말하려고 하지마! 넌 그자식땜에 가려는 거잖아?"
"너 때문이기도 해..."
"널 사랑하지 않아. 그리고 널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언젠가
넌 내사랑을 의심하게 될꺼야.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아."
"정우야,내가 갈 수 있을 때...보내 주렴."
"진짜,잔인하군 너란 사람은"
"그렇다면 그에게 돌아가지 그래? 도망치지 말고."
"아니,난 새로 시작할 꺼야"
정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정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청량리 역에 이르러
서야 정우는 마지막 악수를 건네며 내게 말했다.
"차라리,그냥 말하지 그?O어.이렇게 춘천까지 데려가지 말고.
너 땜에 난 다시는 춘천에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
"미안해 정우야.정말 고마웠어."
"고마울 것 없어. 난 금방 잊을 꺼야."
마지막까지 날 배려해주려는 그의 마음에 난 가슴 저렸지만,그
의 사랑의 깊이를 알 수는 없었다. 그의 사랑은 얼마나 컸던 것
일까.결국 사랑도 각자의 몫이 있는 건 아닐까.
각자의 몫은 결국 자신이 짊어지고 가는 건 아닐까.
태경을 비롯한 친구들과 환송회를 마치고,짐을 싸서 부치고,학
교에 마지막 인사차 들러 교수님들께 인사를 드리고,그리고 나
서 정말 성진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성진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그런 것 조차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우린 서로에게 서서히 그냥 잊혀지면 되는거야.
난 시간의 힘을 믿었다. 어떤 고통도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진
않아도,색이 바래고,흐려진다고 믿고 있었다.
얼만큼 시간이 지난 후에 잊혀지느냐는 그 고통의 깊이 만큼이겠
지만,결국은 감당 할 수 있을 만큼 견디기만 한다면,그런 날이
오리라 믿고 또 믿었다.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은 그 동안의 나의 생활을 정말로 깊이 반
성하게 했다. 그녀들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광스러운 삶을
살았던가 반성하게 했다.힘들게 서서 종일 일하고 졸면서도 공
부를 하길 바랬던 그녀들. 부모들의 가난때문에 포기할 수 밖
에 없었던 공부를 시켜준다는 이유만으로 박봉과 고된 노동을 견
디는 그녀들에게 나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처음 그 곳으로 가려
고 했을 때,낮엔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 할 수 있다는
점과,입시의 부담이 없다는 점 그리고 여느 학교 못지 않은 보
수로 난 만족했었다. 그런 어줍잖은 생각만으로 그곳으로 떠났
던 나는 정말 그녀들에게 잘하고 싶어졌었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들은 날 반기지만은 않았다.
나이차이가 얼마 되지않는 학생도 있었고,무엇보다 팔자좋게 곱
게 자란 것만 같은 내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차차 내가 진심으로 그녀들을 대하자 그녀들도 나를 받아
주었다. 난 그녀들이 지쳐서 포기하지 않도록 애썼다.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수업이 어렵긴 했지만,어떻게든 열심히 하려고 노
력했고,더 공부하길 원하는 학생에겐 따로 시간내어 집중적으
로 입시를 도와 주기도 했다.
그리고 힘든 날들 중에도,그녀들과 수업후 허름한 분식집에서
간식을 먹으며 얘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런 보람과 기쁨은 나
에게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수업시간 중에 어느 학교에서처럼,첫사랑 얘길 해달라고 졸라오
면 잠시 쓰린 가슴이 되기도 했지만,되도록 담담히 그리고,아름
답게 각색해서 그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사랑이란 그녀들에게도 정말 필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들 속엔 또다른 혜정이도 많음을 난 알게 되었다. 객지 생
활로 고달프고 외로운 그녀들에게 사랑은 또다른 마력인 동시에
아픔으로 다가 오기도 했음을. 나는 정말로 언니같은 심정으로,
그녀들이 그런 상처를 받게 되지 않기를 바랬다.
시간은 처음에 내가 바랬던 것처럼,나에게 상처를 치유하는 힘
이 되어주었다.내가 그렇게 새롭게 나를 시작하는 동안 친구들
은 결혼을 하고,애기 엄마가 되고,태경을 비롯한 몇몇은 졸업
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