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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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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백발마녀 2000-04-07

삐리릭..
삐리릭..
..음..

삐리릭..
삐리릭..
..음..음..
..아..이건 또 뭐야..

삐리릭..
삐리릭..
..아..

오기가 발동한 듯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전화.
수연은 천근 만근 무거운 몸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눈은 도무지 떠지질 않는다.

"예..예..아..엄마.."
"응?..응..아..아냐..아니..일어나야지..응..'
"..아..근데..왜요?..아..왜 전화했냐구.."

수연은 금방 전화한 내용을 잊어버렸다.
아..엄마가 ..왜..전화했더라..
..생각이 ..안난다.
금방 전화통화를 했었다는 것 초차 혹시 꿈인가..싶다.


"엄마, 나..유치원..가야되는데..나..늦을것..같아"

7시 다 되어 반신반의로 그냥 누웠다가 순식간에 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실로 너무나 오랜만의 밤샘이다.
대학땐 리포트쓰고 벼락공부하느라 수도 없이 새었던 밤이지만
그 후론 밤샘할 일이 없었고 이미 그걸 견딜만한 체력이 이젠 아니다.

깊은 잠 속에서도 아들의 목소리는 너무 또렷했다.
화들짝 놀란 수연이 거의 기계적으로 아들을 챙겼지만 이미 9시가 넘어버려 아침밥을 챙겨 줄 엄두도 못 내고 요구르트 하나 입에 물리고는 끌다시피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주었다.

조금 늦긴 해도 일단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나자 약간의 긴장이 금새 풀린다.
집에 돌아오자 마자 자석에 끌리 듯 그대로 이불더미에 몸을 묻었다.


...
엄마의 전화는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 시간까지 자는 딸의 목소리에 엄마는 걱정이 앞선 모양이다.

엄마의 전화로 잠시 깨었던 수연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든 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비몽사몽에서도 오늘 해야할 일이 생각난 것이다.
..아..은행에..가야하는데.
오늘까지인데..아..

자신의 몸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내며
수연은 힘 없이 문을 나섰다.
..
마치 독한 감기약이라도 먹은 듯 수연의 몸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아무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기계적으로 은행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수연은..문득.
누군가가 떠 올랐다.
아..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이런 감정이..
그토록 염원하던 감정이 이렇게 쉽게 찾아 올 줄이야..
수연 자신도 믿기질 않는다.

하루종일 그 생각 뿐이다.
설겆이를 할 때도, 아이의 간식을 만들 때도, 심지어 전화통화를 할 때도,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 뿐이다.
정.재.민..
정.재.민..



새벽에 돌아오는 길은 그동안 잊혀졌던 감동을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오후 강의가 있고 계속해서 연결해 공부하다 아침에서야 잠을 자는 생활을 해오다 얼마전 옮긴 곳에서는 오전 강의 때문에 밤을 샐 수가 없었다.
오전부터 시작해서 밤까지 공부하다 돌아오는 길에 있는 pc방에서 보통 1시간 가량 채팅하다 12시30분이나 늦어도 1시 쯤이면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던 일과였다.

새벽길을 걸어본 일이 얼마 만인가..
아직은 추운 날씨지만 마음이 너무 가벼웠다.
상쾌하다.
이런 마음이 단지 상큼한 새벽내음만이 아님을 재민도 안다.
..아..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하면서도 또 다른 한 구석은 아리다.
이런 아린 마음을 그 동안 잊고 살았다.

재민은 애인이 있었다.
그녀와 헤어진것이 벌써 2년을 훨씬 넘었다.
그녀와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녀와의 헤어짐은 곧 모든것과의 단절이었다.
재민은 그녀와의 헤어짐 후 건전치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외로움을 풀었지만 그런 경험은 할 수록 재민에겐 더한 고통만 가져다 주었다.
무의미해졌고 자신에게 혐오감마져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실로 오랜만에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무표정한 강사의 얼굴이나 무겁게만 느껴졌던 책이 오늘따라 새로왔다.
뭔가...가볍다.
재민은 평범했던 일상의 이런 특별한 변화가 조금 의아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강의가 끝나고 식권을 가지고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방에서 그냥 가까워서 정한 곳이었는데, 별로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 고시원과 가깝다는것이 유일한 선택이유일수 밖에 없었다.
고시원과 식당과 학원과 pc방은 마치 한 묶음같이 엮여 있었다.
5분이내의 거리에 모든것이 존재해 있다.
여기..신림동 고시원의 풍경이다.

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을 먹다가 문득 그녀 생각이났다.
그제야 재민은 오늘의 특별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재민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두 고리를 연결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요리를..못한다고 했다.
김치도 사 먹는다 했다..
신김치로..할 수있는 맛있는 ..요리를 ..그가..가르쳐 주었다.
..김치볶음밥..

지금 재민이 그 김치볶음밥을 시켰고..먹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목이 메었다.
서둘러 국물로 나온 맑은 된장국을 그릇째 들고 마셨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마..가슴이 아리면서 그 때문에 목이 메었던 것일 게다.
..

어떻게 이렇게 하루종일 가슴이 두근거릴수 있을까..
연애를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상대는 얼굴도 모르고
더군다나 그녀는..유부녀다..

재민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은 내일이다.
그러나 오늘 꼭 만나고 싶다..만나야 한다.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수 없는 이끌림이었고 그건 너무 강했다.
..그녀를 만나지 못해도..그래도..챗팅을..하러 가야했다.
그냥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도 남편은 집에 오지 않는다.
결혼 후 거의 주말부부처럼 살았다.
결혼 초엔 공부와 실험때문에..
그 후엔 논문 쓰느라..
학위를 취득한 뒤엔 연구소에서 연구하느라..
궂이 집에 올 수도 있었지만 오가며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아깝다며 특별한 일이 아니면 주말에만 집에 왔다.

그런 생활이 수연의 라이프스타일에는 딱이었다.
5일간의 자유로운 생활.
주말에만 만나기 때문에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남자.
그런 생활에 결코 불만이 없었고 오히려 편안한 자유를 수연은 즐겨왔다.
하고싶은 공부도 하고, 배워두면 쓸모있을 것 같아 홈패션이나 양재도 배우러 다녔다.
컴퓨터도 배웠다..그건..당연한..시대적..요구니까.

처음엔 컴맹수준만 벗어나보자하고 시작했던 컴퓨터공부가 수연에게 맞았던지 초급과정과 중급과정을 아주 신나게 마쳤고 그러자 더 욕심이 생겨 인터넷도 공부하게 되었다.


남편이 없는 빈 집에서 컴퓨터를 하는 수연은 그만큼 자유로울수 밖에 없었다.
..아..내일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수연은 기계적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
도저히 그냥 잠을 잘 수 없었다.
비록 약속은 내일 했지만.
..어쩌면..그가..올..수..도 ..있었다.

..초보자방..
...
...
앗!..
'안녕하세요..천상님..'

숨이 딱 막혔다.
너무나 손이 떨려 도저히 타자가 제대로 쳐 지질 않았다.
정.재.민.
그가 왔다.
그가..왔..다..
그가..


수연과 재민의 두번째 만남.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