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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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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백발마녀 2000-04-06

천수연과 정재민.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 둘이 만난곳은 천상의 방.

수연과 재민은 마치 굶주린 야수같이 너무도 강렬하게
서로를 끌어 당겼다.
30대 중반인 가정주부와 갓 서른을 넘긴 노총각.
사회적인 통념으로 본다면 그건..불륜이다.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처녀시절에 비해 너무도 단조롭고 조용한 생활을 해 왔던 수연에게 언젠가 부터 자신의 나머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것은 더 이상 긴장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간다는것.
그것은 여자로써 너무나 처절히 서글픈 일이었다.
수연은 자신에게 여자로서 살 수 있는 기회가 하루하루 줄어든다는 생각에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사건(?)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일기 시작했다.
가슴 설레이는 일.
내가 여자로서 대접 받을 수 있는 일.
인생이 이대로 끝날 수 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켜왔던 자신의 평화로운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만한 그 무엇을 아직 찾질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 댓가를 치를 만한 용기가 없었기에 그런 일을 피해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런 수연에게 채팅에서의 재민의 만남은...
자신이 가진것을 지키면서도 그렇게 원하던 여자로서의 마지막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사건이었다.
적어도 수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수연에게 이 만남의 시작이 그녀가 원하던 방식으로 계속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차체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늪이었다.
수연이 막무가내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것.
그건 너무도 당연했다.


....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길을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고 그래서 낯선 서울에 와서 자신의 생활관과는 너무도 다른 철저한 고시생활을 해야 했던 재민에겐 하루하루가 숨막히는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기엔 자신이 궁지에 몰려있다는 현실감만 증폭될 뿐이었다.

계절을 즐기고 바람과 빗소리를 즐기고 그냥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기를 너무도 원했지만, 그를 둘러싼 화려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목이 조여지고 있음을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떠밀리다시피 해서 들어온 고시촌은 그러한 재민에겐 다른 고시생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몸부림을 치게 만드는 잔인한 사회였다.

쉽게 사람을 사귀지 못하는 재민은 그나마 절친한 친구들을 멀리하고 고즈넉히 자신의 세계를 비좁은 방안 보다 더 비좁게 움츠려뜨리고 있었다.
그나마 얼마전부터 서울로 이사오게된 큰형내외가 몸 보신 시켜준다고 가끔 불러내는 것이 낯설지 않은 유일한 만남이었다.

근처의 PC방에 들르게 된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이었다.
재민에겐 당연한 절차였던 것이다.
게임을 무척 싫어하는 재민이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소일거리는 채팅이었다.
그 곳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그리 힘들여 수고하지 않아도 되었고 또 어느정도 낯(?)이 익으면 마치 오랫동안 사귀어 오던 사람들 같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수 있어서 좋았다.

낯선 만남 자체가 지치고 무감각해진 재민에겐 무척 피곤한 일이라 자기보다 나이어린 사람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재민은 누나나 동네 아줌마 같은 부류의 상대가 좋았다.
아니, 편했다.
그다지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고 서로의 힘겹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소탈하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런 재민이 채팅을 시작한지 2주일쯤 되었을때 만난 사람이..
수연이었다.
그녀도 재민에겐 단순한 어떤 아줌마(?)였다.
처음 채팅방에 들어와 쩔쩔매던 아줌마.
그런 가여운 아줌마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났고,
그 날,
그 둘은,
7시간 반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것도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긴 행로였다.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만큼 ..수연과 재민은 통했다.
어쩌면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 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어쩌나..벌써..아침이네..시계 보셨나요?..'
'아..그러네요.. 6시가 넘었네요..밖이..환..해요..'
'이제 그만 해야겠어요..P님은..오늘도..강의가..있다고..했 던 것..같은데..어쩌죠..피곤해서..잠도 ..못자고..'
수연은 정말로 미안했다.
자신은 이 시간에 잠들면 되었지만 재민은 오전에 강의가 있었다.
한숨도 못잔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괜찮아요..밤 새는것에 이골이 나서..하하..'
'저..그리구..전 매일 여기 올 수가 없어요..그러니까..모레..또 만나요..같은 시각에..'
재민은 지킬수 없는 약속을 한다.
'그래요..모레..11시경에..그럼..이만..'
수연도 지킬수 없는 약속에 응했다.
..

모레의 약속.
그것은 수연과 재민에겐 결코 지켜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