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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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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유수진 2000-03-16



구릿빛 피부에 반짝이는 땀방울.
실물보다 더 멋지게 묘사된 해빈 오빠의 인물화!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큰벽에 옛날 해빈오빠의 인물화가 지금의 멋진 모습으로 바꿔 걸려 있었다.
엄마의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

그동안 내려오지 않은 사이 1층 거실의 소파며, 커튼이 시원한 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엄마는 개인전 준비로 더 바빠졌고, 경빈인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늘었고, 나만이 시간이 정지된 과거의 공간에 빠져,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마냥 그렇게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휠체어에서 내렸다.
두팔로 걸어다니는 내 모습을 누가 보는건 죽기보다 싫다.

반쯤 열려져 있는 경진의 방이 내 시야에 들어 왔다.
아줌마가 낮잠 자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한 후 잠시 망설이다 경진의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어쩜! 이 앤 내가 생각한 그대로 방을 꾸며 놨는지....

분홍색 시트가 깔린 침대벽 한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사진.
긴 웨이브 퍼머 머리에 하얀 벽에 비스듬히 머리와 어깨를 기대고.....
그 작고 날카로운 눈은 나를 노려보는듯 했다.
난 눈에 힘을 주고 액자속의 그녀를 도전적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옮겼다.
정말 예쁜 하얀 원피스!
그녀의 날씬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내 고개를 돌린 난 그녀의 화장대로 다가갔다.
황홀할 정도로 예쁜 케이스에 담겨있는 립스틱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있는게,
경진이 아침에 얼마나 허겁지겁 나갔는지 상상이 갔다.
책상쪽으로 가려다 난 그녀의 화장대 의자에 냉큼 올라가 앉았다.

투명 케이스에 담겨있는 빨간색 립스틱을 들고 살짝 뚜껑을 열었다.

내 손의 작은 떨림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
처음 느껴보는 두근거림.
립스틱은 여자를 정말 여자로 느끼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경진이 입고 다니는 원피스며, 미니스커트, 청바지....
그녀의 모든게 부러웠다.

정상인이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었던 것들.....

난 다시 그 빨간 립스틱을 덧발랐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딘가........어색했다.
색에 민감한 내게 처음 입술위에 내려앉은 그 빨강의 강렬함이 어설퍼 보였다.

거울속의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인기척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경진이었다!

얼굴가득 비웃음을 머금고 쳐다보다
그녀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빈정댄다.

"흐흥...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

팔짱을 낀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와의 길고도 짧은 정적.....
내 머리속에서는 짧은 혼란이 일고.....
그 정적을 깨는 그녀의 외마디 외침!

"아줌마! 아줌마!"

아무 반응이 업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릴 질렀다.

"아줌마! 아줌마!
뭐해요. 이 물건 빨리 안 치우고....."

'쿵쿵쿵쿵.....'

"아이구마~ 갱진학상 언제 들어왔노?"

"으잉~
이기.......무신.......
이기 이기 미?나. 니 정신이가..."

휙 달려드는 아줌마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아갸갸갸갸갸갸........"

"어쭈! 이 도둑 고양이 같은게....."

경진은 거실에 있는 빈 휠체어를 보며 다시 내게 고개를 홱 돌린다.

"너 팔로 걸은거야.
그래. 그럼 니 팔로 걸어나가!
빨리!
그 우스꽝스런 모습 실컷 감상해 줄테니까....
함 걸어나가봐. 걸어 나가보란말야!"

난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내뱉었다.

"더러운 년....."

"......................
뭐라구?"

"너 같은 년은 없어져버렸음 좋겠어.
더러운년. 더러운년....."
난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흐흥....
이 병신이........"
경진은 내게 와락 달려들었다.
난 있는힘껏 그녀의 머리체를 휘어 잡았다.
경진도 만만치 않게 내 머리를 잡고 흔들어 댔다.

"이 병신같은게... 이 병신......."
그녀의 끊임없는 욕설들이 더 나를 자극했다.
악착같이 경진의 머리를 잡고 매달렸다.

"아이구마, 와이라노!
그만들 좀 하그래이....
퍼뜩 이 손 안놓나.
노으라카이. 노으라..."

아줌마의 억척스러운 손에도 우린 떨어질 기미가 안보였다.

"지발좀 이러지들 마래이...
해인이 니 안놓나!"

끈질긴 손에 의해 떨어진 우리들의 숨소리가 방안가득 가쁘게 차올랐다.

난 '휙-' 들려나가며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난 니가 얼마나 더러운년인지 알아.
나쁜년.....
넌 악마야!"

순식간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중 경진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악악 들렸다.
"야 이 병신같은년아. 너 아직도 착각하나본데...
병신이면 병신답게 살아!
한번만 더 내방에 들어오면 휠체어 박살내 버릴거야!"

침대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너무 꽉쥔 주먹에 손이 아파 '확-' 폈다.

경진의 갈색 퍼머 머리카락 한줌이 우수수 떨어진다.

침대맡의 손거울을 들어 얼굴을 비췄다.

헝클어진 머리에 충혈된 눈.
빨간색 립스틱으로 온통 엉망이된 입주변.
마치 피빛처럼 섬뜩해 보였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내렸다.
여기저기 내 짧은 단발 생머리카락이 떨어지며 내 손에도 한줌 쥐어 나온다.

멍하니 내 손의 머리카락 뭉치를 보고 있는데..
"아아아아아악-......."
경진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쿠당탕탕탕탕탕탕-.........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을 확 열어제끼며 경진이 아줌마에게 제지 당하며 악을쓴다.
"너! 죽여버릴꺼야.
죽여버릴꺼야 "

"아이구마, 갱진이가 고마 참으래이-
자가 정상 아니잖은게벼.
참으래이-"
일그러진 경진의 얼굴에 송글 송글 피가 맺혀있다.
내 손톱으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방문이 쾅 닫히고 둘의 실갱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놔! 놓으란 말야!
이거 못놔!"

"갱진 학상. 고마 내리가자!
언능 약발라야지. 흉된다 안카나.
내리가자. 내, 약 발라 주꾸마."

"아아아아아아악-
내얼굴, 내얼굴.....
아아아아아아악- "

경진의 대성통곡 소리가 멀어져간다.

멍하니 방문을 쳐다보다 난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푸풋- 푸아하하하하하하하하..........."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기분.
긴 시간을 그렇게 웃었다.


꿈속에서......
나는
경진의 까만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눈처럼 흰 내 다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뿐. 사뿐.
나비처럼 가볍게 정원을 뛰다시피 거닐고 있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경빈의 환한 미소가 날 반긴다.
난 경빈에게 똑같은 미소를 보내고, 해빈오빠의 방으로 사뿐 사뿐 걸어들어간다.
오빠가 보인다.
난 두 다리로 뛰어 가 오빠를 꽉 껴안는다.

"어이구~
우리 해인이 몰라보겠는데....
이제 숙녀가 다 됐구나."
오빤 나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해빈 오빠, 해빈 오빠....."
난 너무나 기뻐 들뜬 목소리로 오빠를 부른다.

"오빠 봐! 나 이제 다리......."

오빠에게 내 예쁜 다리를 자랑하려고 밑을 보았는데
경진의 치마밑으로 그 아름답던 다리가......

'헉!'
내다리. 내 다리가......

'드르르륵-'

오싹한 한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인기척에 어둠속에서 눈을 떴다.

까만 물체......

누구? 경빈이?

방 창문을 열어놓고 잔 모양이었다.
저렇게 자상하게 닫아줄 사람은 경빈이 밖에 없는데.....

어둠속에 내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그 까만 물체는 내가 자고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여름 홑이불을 살며시 덮어주며 내 머리맡으로 향하려던 손길을 거두고는 천천히 등을 돌려 나가는.......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기쁨의 뜨거운 눈물이.....

커튼이 들춰진 창의 엷은 빛에 반사돼던 그리운 얼굴.

해빈 오빠.
날 잊지 않았구나.
날 잊지 않았어.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