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사람을 잡았으면 이젠 놓아줄만도한데, 아직도 놓아줄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순환기내과에서 나를 잡아채고는, 내 귀한 혈액을 승락도 없이 멋대로 체취해 갔다. 낸들 앙탈 한 번을 부려보지도 못하고 멀거니 앉아, 끽 소리도 못해보고 그 귀한 혈액을 도둑 맞았다.
진료실에서는 심장초음파 영상을 걸어 보이며,
''이 하얀 끈 같은 것이 없어야 하는데.... 뭐,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몸 회복되시면 봅시다.''
그렇다하니 그런 줄 알지 낸들 뭘 아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니 우선은 맘을 놓는다.
''선생님. 제가 시방 80이거든요? 얼마나 버틸 것 같습니까. 한 2~3년은 견딜 수 있을까요?''
의사는 환히 웃으면서 내 얼굴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며 말한다.
"제가 뵙기에는 그 보다 훨씬 더 오래 버티실 수 있으실 것 같은데요?!"
아직 설명 중인데 나는 두 무릎을 짚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하마트면 만세라도 부를 뻔했다.
"아이고 그만하면 됐습니다요. 그만큼만 버티면 되지요. 그만큼을 더 살면 감사한 일이지요."
문밖의 환자들은 아마 내가 다 완쾌된 줄 알지 않았을까. 희색이 만면하여 진료실을 나섰다.
로비에서 혈압을 재던 영감이, 진료실을 나서는 나를 우거지 상으로 맞는다. 그의 손에는 여러번 혈압을 재고 인쇄를 한 용지가 들려있었다. 뺏듯이 낙아채서 들여다보았다.
"212......" "198...." 혈압이 원래 높기는 좀 높았지만, 이렇게 다락같이 높지는 않았는데.
"당신이 속을 썩여서...."
정말 그래서였을까? 마누라 죽는 걸, 부지깡이 하나 없앤 것쯤으로 여긴다 하지 않았던가?"
"아니, 저 영감이 내가 죽을까봐 신경을 쓰긴 쓴 겨? 자기가 언제 날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했어"
내가 죽게 앓았다고 설마 죽을까봐 걱정이나 했을까. 워낙 차거운 사람이라서 마누라가 죽거나 말거나 그랬던 거 아니여? 막내딸이 나섰다.
"엄마가 입원실에 옮겨지고 첫 끼니 드실 때, 아빠도 그 때에야 첫 끼니 자셨어요."
"엄마 독방에 계실 때 아빠 손이 이렇게 부들부들 떨렸어요."
정말 그랬을까? 영감이 정말 내가 죽을까봐 겁이 났을까? 허긴. 지금 그 나이에 누가 들어와 살겠어. 여보! 정말 내가 죽을까봐 겁이 난겨? 당신 밥해 줄 사람 없어서 밥 굶을까봐가 아니구?
(참 요상한 영감이다. 싱싱하게 한창 솟아오르는 화초도 있는데, 모진 겨울을 겨우 이겨내고 나오는 잔칭이를 보듬어 안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그게 귀한 생명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