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2,989

눈 내린 날의 풍경화


BY 귀부인 2024-05-29


눈 내린 날의 풍경화

                                            (2015년 1월 눈 내리는 요르단에서)


  눈이 내린다.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는다. 어느 친구는 눈 내리는 날이면 가슴 아프게 헤어진 첫사랑의 남자를 떠올린다는데, 직장에서 만나 사귄 지 고작 4개월 만에 결혼한 나는 아련하게 떠올릴 첫사랑은 없다. 그러나 눈 오는 날이면 늘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등을 내주었던 분,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선물 받았던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는 읍내에서 십 여리나 떨어진, 사방이 산으로 삥 둘러싸여 손바닥만 한 하늘을 이고 살던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옆집의 밥그릇이 몇 개고, 수저가 몇 개며, 누가 무얼 했는지, 누가 아픈지, 슬픈지 숨겨지지 않던 곳. 모든 이웃이 가족 같은, 가난했지만 정이 넘치던 마을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눈 내리던 겨울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즈음엔 발목 위를 푹 덮을 만큼 수북이 쌓였다. 병치레가 잦았던 작은 언니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하얀 얼굴에 사슴처럼 맑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언니는 길 가던 사람들이 뒤돌아볼 정도로 예뻤다. 함께 다니면 어깨가 으쓱했다. 하지만, 자매인데 어쩌면 둘이 그렇게 닮지 않았느냐는 말을 들을 땐, “니는 와 그리 못생겼노?”라는 소리로 들려 속상하기도 했다. 


천식을 앓던 언니가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면 마치 어항 밖으로 튀어나온 한 마리 금붕어 같았다. 숨넘어갈 듯 파닥이는 언니 옆에서 엄마는 사색이 되고,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아버지도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라 하셨다. 병약한 언니는 우리 집의 공주였다. 예쁜 옷도, 관심도 모두 언니 차지였다. 아픈 언니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가끔은 서운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따듯한 아랫목에 누워 있는 언니를 부러워하며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갈 땐 으레 언니랑 나란히 걷던 길을 혼자 걸으려니, 쓸쓸하고 무섭기도 했다. 발목이 푹푹 빠져드는 눈 위를 얼마 걷지도 않아 양말이 푹 젖어버렸다. 발은 시리고 집은 아직 멀었는데 내 다리는 너무 짧았다. 혹시 이러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 허리만큼 눈이 쌓이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힘겹게 내디뎌 보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혹여 발이라도 삐끗 잘못 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가슴이 콩닥거리고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꼬옥 감았다가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중절모를 쓴 남자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순간 온몸의 힘이 풀렸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늘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색해 쭈뼛거렸다. 아버지는 등을 내밀며 업히라는 시늉을 하셨다. 그랬다. 아버지는 말보단 표정으로, 눈짓으로, 몸짓으로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나도 그냥 말없이 아버지 등에 매미처럼 업혔다. 콩닥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내리는 눈이 더는 무섭지 않았다


족히 십여 리나 되는 집으로 가는 길. 펑펑 쏟아지던 함박눈이 볼 빨간 작은 계집아이 단발머리 위로, 아버지의 멋진 중절모 위로 소리 없이 쌓여갔다.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아버지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조심스레 뒤따라 오던 뽀드득뽀드득 소리 외엔 고요함을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 아래, 어딘가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꿩 한 마리가 아버지의 어험! 하는 헛기침 소리에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 날갯짓에 소나무 잔가지에 소복이 쌓여있던 눈이 무지갯빛을 내며 와르르 쏟아지고, 내 눈은 꿩을 쫓아가고, 단발머리에 쌓인 눈이 아버지의 등에 내리고……. 아버지와 나는 함박눈이 조용히 그려가던 세상 속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힘차게 걸으시던 아버지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단발머리에 눈이 쌓여갈수록 내 눈꺼풀은 무거워졌다. 아버지의 등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넓고 단단하면서도 포근한 세상. 그곳에서 단발머리 작은 계집애는 뽀드득 소리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넓고도 푸근한 잠자리였다


저녁 먹고 자라며 깨우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꿈결인 듯 들려왔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앉은뱅이 밥상이 어른거렸다. 돌아앉아 계신 아버지의 등도 일렁이는 불빛에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10여 리 길을 업고 걸으시기엔 아버지라도 힘드셨을 텐데…….’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넓은 등을 바라만 보았다. ‘손만 잡고 걸었어도 좋았을 것을…….’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지고 코가 시큰거렸다. 그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사랑하고 있음을, 사랑받고 있음을 가슴으로 깨달았다. 아픈 언니에게 온통 사랑을 빼앗긴 줄만 알았는데……. 이불을 덮어쓰고 한참을 훌쩍였다. 마음에 앙금처럼 쌓였던 서러움이 다 가시는 날이기도 했다.


속 깊은 사랑을 말이 아닌 가슴으로 깨닫게 해주신 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때 하늘나라로 가셨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엔 희미한 등잔 불빛이 일렁거리던 아랫목 따듯한 방이 그립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나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깨워 주시는 젊고 고운 어머니와 내가 일어나기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던 방. 그리고 동화 속처럼 작고 아름다운 산골 마을을 뛰놀던 볼 빨간 단발머리 작은 계집아이가 있던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멋진 중절모와 회색빛 두루마기를 입은 사진 속 중년의 아버지. 근엄한 표정 너머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나를 업고 눈길을 걸으시는 아버지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내 기억 속에 멈춰있다. 선명한 풍경화 한 장이 내 마음에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