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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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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직은 여자라요


BY 만석 2023-06-06

갑자기 냉장고 정리를 하고 싶었다. 이럴 땐 뭉기적거리지 말고 서둘러야 한다.
요새로 잘 익은 깍뚜기 국물에 맛 들여서 냉장고가 허전하다.
요새만 같으면 김치냉장고가 없어도, 냉장고만 가지고도 살만하겠다.
아니, 냉장고도 외쪽문 짜리라도 괜찮겠는 걸.

그런데 냉장고 속 저쪽 구석에 숨어있는 저건 뭘까? 냉장고 정리는 언제나 내가 전담했을 터.
아무리 쥐어짜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구석에 박혀있는 모양새로 보아 금방 손을 대려고 계산을 했던 건 아니성 싶다. 깊게 팔을 뻗어 꺼내고 보니 간장 색깔이 난다. 병도 작은 크기가 아니어서 솔찮다. 이만하면 이젠 무릎을 칠만 해야 하는데, 아직도 생각이 나지 않으니 치매 아녀?

오마나~. 꿀이다. 한참을 쏘아보았더니 이제야 생각이 난다. 꿀이 집에 많이 있는데, 시어머님이 또 보내주셨다며 막내딸아이가 들고 왔었다. 세상에~.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담 . 아마 2~3년은 족히 지났지 싶다. 어렵게, 이렇게라도 생각이 났으니 치매는 아니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자주 손을 데지 않았으니 더욱이 원액의 꿀은 유통기한에 상관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 맛사지에 쓰던 양봉의 바닥이 보여서, 걱정을 하던 참이다. 경제도 어려워졌는데 그 비싼 양봉을 맛사지용으로 구입을 한다는 게, 양심에 찔려서 걱정을 하던 중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꿀단지를 꺼내 놓고는, 공짜로 생긴 것만 같아 신이 난다. 그동안 걱정없이 꿀맛사지를 해 온 것으로 보아, 가히 어려운 가정경제는 아니었나 보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냉장고 정리가 바쁘더냐. 갑자기 맛사지가 급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꿀이 바닥이라, 일주일에 두 번씩 하던 맛사지를 요새로 일주일에 한 번씩 했으니....냉장고에서 꺼내 놓은 반찬이며 양념들을 다시 제위치로~!  저녁 일곱시. 살그머니 안방문을 열어본다. 영감이 졸기라도 해야 내 움직임이 수월할 텐데 싶어서다. 영감은 아직 TV시청 중이니 언제 잠이 들기를 기다리냐는 말이지.

"시방 그 얼굴에 맛사지나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말을 할 위인은 아니다. 그러나 속으로라도 그리 생각하지 않겠는가. 맛사지가 문제가 아니라 쳐진 눈꺼풀이며 줄줄이 파여진 주름은 어쩌려고. 아니지. 차라리 영감이 그렇게라도 표현을 한다면, 서로 허허 웃고나 말 일이지만 영감은 말없이 속 없다 할 게야.

다시 안방문을 열어보니, TV에서는 레스링을 중계한다. 이러면 영감은 12시까지라도 족하다.
'에~라! 내가 뭐, 나쁜 짓 하는 겨? 이제껏도 하던 일인 걸.' 맘이 급해졌다. 레스링도 잘~하면 두어 시간을 중계하기도 하거든? 영감은 평소에도 내 방문은 잘 열어보지 않으니까. 그건 하나 내가 길을 잘 들여놓았구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직도 길들이지 못한 일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냉장고에서 빻아 놓은 들깨를 꺼내어 작은 접시에 한 스푼을 체에다 걸러서 받혀놓는다. 꿀도 스푼으로 두어 개 조심스럽게 떠서 섞어 놓는다. 와~ 오늘따라 들깨가 더 고은 것 같다. 이제부터는 마음이 급하다. 이왕이면 영감이 나오기 전에 끝내야지. 사실 영감에게도 조금은 부끄럽고 쑥스럽긴 하걸랑. 아무리 만나이로 말한다해도 팔십이 불원하지 않은가 ㅎㅎㅎ. 영감이 흉이라도 볼라치면 어째.

꿀에 젖은 들깨를 발랐더니 몰골이 흉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흉칙하다. 그래도 맑은 물에 세면을 하고나면 보람은 있걸랑. 여지껏 해오던 짓을 그만하기도 섭섭하다. 그렇게 바쁘게 살던 때에도 쉬지 않고 하던 것을. 아무도 봐주는 이 없다 해도 자기만족이다. 그래서일까? 이쁘다 소리는 듣지 못해도, 피부가 끝내준다는 소리는 듣고 산다. 피부라도 좀 봐 줄만해야지 ㅎ~.

한참 몽상에 잠겨있는데 등 뒤가 무겁다. 나도 모르게 잽싸게 돌아다 본다.
에구구~. 영감이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차례자세로 선다. 눈이 휘둥르레진 영감은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알았다는 듯이 허리를 젖히며 입을 벌린다. 영감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서 '하하하'하고 웃는 법이 없다. 나는 결혼 후 영감이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소리도 없이 크게 입을 벌리고 웃던 영감이 사례가 들렸나 보다. 한참을 허리를 굽혀 쿨럭거리던 영감이 참지를 못하고 재빨리 열린 문으로 나간다. 이게 뭘 웃을 일인가. 공연히 심술이 난다. 아니.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니니 못 본척 좀 해주면 좋을 것을 말씀이야.
"팔십이 낼 모레라도 나도 아직은 여잔디~!"  영감은 다시 돌아와서  어린아이한테 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영감의 만면엔 웃음이 가득하다.

'쳇. 내 나이가 워때서. 기운 떨어질 때까지는 할 겨~! 나도 아직은 여자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