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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할 자리


BY 귀부인 2022-09-16

있어야 할 자리


쨍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예쁜 꽃 무늬 화려한 양산을 쓰고 멀리 십자가가 보이는 교회로 향했다. 오랜만에 뾰족 구두를 신고 대로를 건너 고추밭을 끼고 돌아 고구마 밭을 지났다. 비스듬하니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오르자 포도밭을 정원 삼은 작은 교회가 보였다.

아, 그런데 이거 어쩌나?
교회 맞은편, 초록색 철 대문 집 앞에 하릴 없는 누렁 개 한 마리가 아침 더위에 졸리운 듯 반쯤 눈을 감고 , 철푸덕하니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심심한데 너 잘 만났다 하고 사납게 짖어 아침부터 온 동네를 소란하게 하면 어쩌나 싶어 감히 지나가지도 못하고 망부석처럼 서서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귀를 쫑긋 움직이는가 싶더니 감긴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다행이도 내가 대수롭지 않게 보였나 이내 만사가 귀찮다는 듯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후유, 가슴을 쓸어 내리고 행여 심기를 건드릴까 숨조차 삼키며 누렁 개 앞을 지나갈 때 구두 뒤꿈치도 들었다.

오늘이 예배 드리는 날이 맞나? 내가 예배 시간을 잘못 알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교회 앞마당은 적막했다. 무거운 유리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와 습기가 나를 맞이했다. 턱 하니 숨이 막혔다. 낡고 오래된 긴 나무 의자와 장판 깔린 바닥은 사모님이 얼마나 정성스레 쓸고 닦으셨나 반들반들 윤이 났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 아이(알고 보니 목사님 딸)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뽀글 파마 머리 할머니 한 분과 숏 컷을 한 선한 눈빛의 사모님이 낯선 사람의 방문에 깜짝 놀라며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10분을 기다려 예배 시간이 되었지만 더 이상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목사님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할머니(찬송가도, 성경 말씀도 사모님이 일일이 찾아 주셨지만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 분과 나, 그리고 당신 딸과 사모님 네 사람을 앉혀 놓고 마치 교회 안에 사람이 꽉 차 있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말씀을 전하셨다.
좌우 양 벽에 매달린 선풍기가 무더위와 맞서 삐걱삐걱 힘겹게 돌아가고, 열린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아닌 무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눈치 없는 매미는 왜  그리 시끄럽게 울어 대는지. 다섯 명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와 경쟁이라도 하듯 목청을 높였다. 예배 시간 내내 설교 하시는 목사님 목소리 보다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 만큼 요란했다.

목덜미를 타고 주르륵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등줄기에도.... 목사님 설교 소리가 아련했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앗! 설교 시간에 졸다니.....
화들짝 놀라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불끈 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목사님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코로나 이후에 이 핑계 저 핑계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성도들에 대해, 마침 장날이라 교회가 아닌 시장으로 물건을 팔러 나간 성도들에 대해, 주일 날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예배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 하셨다. 정작 그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야 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나마 몇 안되는 성도들이 늙고 병들어서 못 나오고, 믿음이 연약했던 성도들은 코로나 기간 동안 교회와 더 멀어져 버린 안타까운 상황에 목사님이 참 힘이 안 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시골 동네 언덕 위 십자가에 불을 밝히고, 교회를 지키며 기도하시는 목사님의 건강과 복음의 열정이 식지 않으시길 기도했다.

고구마 밭을 지나 고추 밭을 끼고 돌아 대로를 건너 집으로 돌아 오는 동안 '있어야 할 자리' 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해서, 또는 있지 말아야 할 자리에 있어서 겪어야 했던 일들 몇 가지를 주르륵 떠 올리며 있어야 할 자리와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잘 분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