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구 년 만에 남편과 함께 나란히 뒷산을 올랐다. 운동을 싫어하는 남편이 웬일로 나를 따라 나선길이다. 언덕길을 열심히 오르는데 어깨를 쭉 피라며 남편이 등을 툭 친다. “다 핀 건데” 하며 힐끔 쳐다보니 나랑 키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냐? 묻는다. 3차째 가해다. 젠장 몇 번을 말했건만 또다시 나를 가해 하나 싶어 눈으로 레이저를 쏟아내니 움찔한다. 아무리 늙었다고 핑계를 대도 그렇지 대체 몇 번째야 좀 너무하네! 했더니 히죽이 웃는다.
건강검진에서 처음 키가 줄었을 때 혹시 잘못 잰 거 아니냐는 내 말에 “줄었겠지요.” 하는 간호사의 무심한 대답을 듣고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무도 줄었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더니 해마다 야금야금 줄어서 무려 4cm가 줄었다. 키가 자꾸 줄 때 신경 써서 체크 해야 하는데 특별한 증상이 없어서 무심했었다. 작년 3월부터 어깨 통증이 시작되고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여기저기 검사를 하다 보니 골다공증 수치가 심각했다. 그래서 키가 그렇게 줄었구나?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흘려보낸 시간 들이 억울했다.
키가 많이 줄고 나니 바지가 전부 치렁거려 입을 수가 없었다. 젊을 때 높은 구두를 신으면서 입던 바지는 구두 굽이 낮아지면서 길이를 줄여 입었는데 나이 들면서 운동화로 바뀌고 키까지 작아졌으니 한 번 더 줄여 입어야 했다. 날을 잡아 거실에 바지들을 죄다 내어놓고 가정용 재봉틀을 끄집어냈다. 적당한 길이를 가늠해서 잘랐는데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남편이 잘못 잘랐다며 바지를 주워들고 흔들면서 너무 짧단다. 아니라고 맞는 거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짧다고 우긴다. 4cm가 줄었으면 4cm를 자르는 게 맞지 왜 자꾸 염장을 지르냐는 나의 고함에 조용해졌다. 2차 가해였다.
어깨 통증이 심해지면서 대학 병원에서 m r I도 찍고 통증 클리닉도 다니면서 병원을 여러 군데 전전했었다. 집에 있을 때는 한동안 찜질팩을 끼고 살았다. 양쪽 어깨에 대고 소파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소파가 작아서 바꿔야겠다고 구시렁댄다. 6인용 소파가 뭐가 작다는 거냐? 하니 당신이 맨날 누워있으니 소파가 꽉 찬단다. 벌떡 일어나서 소파 길이 240cm 내 길이 154cm 뭐가 꽉 차냐는 내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당신 154cm밖에 안 돼?” 묻는다. 키가 4cm가 줄고 골다공증이 –3.1 이라고 한숨까지 쉬면서 이야기했는데 까맣게 잊었다.
친절한 이 남자의 변은 1차 가해는 내가 누워있는 게 불편할까 봐 애가 타서 그랬고 2차 가해는 바지를 잘못 잘라서 내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고 3차 가해 때는 구부정한 자세가 내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노심초사했다기에 제발 좀 그만하라고 그놈의 친절에 콜레스테롤 수치, 간 수치 다 올라가고 골다공증 수치만 더 내려가게 생겼다고 화를 냈다.
다음 날 아침 T.V가 반은 까맣고 그나마 반도 희미하게 나온다. 어랏 어제까지 멀쩡히 나오던 것이 왜? 저러나 싶어 서비스 기사를 불렀다. 도착한 기사님이 액정이 나갔다며 신규로 구매하길 권한다. 액정을 고치는 비용을 물으니 대략 80만 원인데 그거면 다시 구매하는 게 낫다고 설명한다. 이제 11년째인데 이전에 두꺼운 T.V는 20년 가까이 썼는데도 잘 나왔었는데 제품이 얇아지면서 대신 수명이 짧아진 건가요? 묻는 나의 말에 기사님이 내 얼굴을 쓱 쳐다보며 하는 말이 “어머니 그건 아니고요. 예전엔 어머니가 바깥 활동이 지금보다 많으셨을 겁니다. T.V를 켜 놓는 시간이 지금 보다 훨씬 짧았겠지요. 지금은 코로나도 있고 아무래도 장시간 켜놓았을 수 있지요. 또 나이 드시면 시청 시간이 길어지니까요.” 아주 친절하게 설명한다. 묘하게 설득되는데 점점 기분이 별로였다. 알겠어요.
기사님이 돌아가고 얼른 거울 앞으로 가서 흩어진 머리를 추스르면서 오래되신 어머니 코로나로 외출이 불가하여 T.V를 장시간 보셨군요? 어머니 어머니 하는데 ‘흥’ 그대도 그리 젊지는 않더이다. 혼자 중얼거리다가 내 주변에 왜 이렇게 친절한 남자들이 많을까? 혹시 이 땅의 모든 남자가 어머니들에게 다 친절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