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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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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고무신 한 짝


BY 귀부인 2021-02-18


 어릴 때 내가 살던 작은 마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아름다웠다.
겨울이 소리 없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면, 기다렸다는 듯 
동네 어귀의  개나리들이  샛노랑 부리를 내밀었다.

 간혹 겨울이 되돌아와 꽃샘 추위로 심술을 부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진달래마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면,
산새들도 콧노래 부르며 새봄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연 초록 보드라운 새 나뭇잎들은 봄나물이 되어 밥상에 올랐고, 
참기름 한 방울에 고추장만 있으면
밥 한 공기 뚝딱 이었다.

 아직 춥다며 말리는 엄마의 말을 뒤로 한 체, 
노란 줄무늬가 들어간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봄나물 뜯으러 간 날은,  
영락없이 감기에 걸렸었다. 

겨울내내  뜨듯한  아랫목에서 보호 받던 나는, 
찬 겨울을 한 데에서 이겨낸 진달래는 아니었다.
진달래처럼 발그레한 두 뺨을 가졌을 뿐.

여름이면 푸른 나뭇잎들 기운에 밀려 앞 산이 
우리 집 앞으로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 소나기 내리던 여름날의 풍경이 선명하다. 
고소한 기름 냄새 풍기며 부추 전을 구워 주시던 엄마.
마당 한 켠에서 마치 우리 집 지킴이처럼 서 있던 감나무 아래엔, 
장독대들이 옹기종기 모여 비를 피했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시던 엄마의 작은 정원에서 꿀을 따던 벌들도 
잠시 일손을 놓았다.
뙤약볕에 지친 꽃들은 세찬 소나기에 몸을 흔들거리며 
먼지 쌓인 몸을 씻느라 분주했다.

 소낙비 쏟아진 다음날엔 한바탕 시원하게 목욕을 끝낸 앞 산의 키 큰 나무들이 
햇볕에 잎을 반짝이며 왕성한 생기를 내뿜었다.

 엄마는 무섭게 자라는 여름 풀들이 비를 맞아 더 자랐을 거라며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셨다.
부리 나케 숙제를 마친 나는 엄마가 계신 콩 밭으로 가기 위해 
새로 산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밭으로 가는 길에 건너야 할 작은 도랑은 제법 물살이 센 
개울 물이 되어 있었다.
새 신이 떠내려 갈 세라 발가락에 힘을 꼭 주고 개울 물을 건넜다.

한나절을 하얀 머릿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김을 매던 
엄마의 부지런한 손길로, 
어느새 잡풀들이 사라지고 
콩 잎들이 나란히 줄을 선 모습이 선명해졌다.

돌아오는 길, 질척대는 흙이 잔뜩 들러붙은 검정 고무신의 
흙을 씻어내려다
아뿔싸! 한 짝을 놓치고 말았다.
센 물살이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내 고무신을 잡아채곤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한테 혼날까 봐 
무서워서가 아니라 미안해서 였다.
가을걷이가 끝나기 전에 돈을 만지기 어려운 우리 집 형편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개울가에 앉아 고무신 한 짝이 아니라 
마치 세상이 떠내려간 듯 서럽게 우는 나를
엄마는 혼내지 않으셨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오늘처럼 혼자 외로운데 햇빛이 좋은 날은 제비꽃, 수선화, 백일홍, 
맨드라미, 해바라기,나팔꽃, 작약 등
철철이 예쁜 꽃들을 피워내던 엄마의 작은 정원이 있던 
고향 집이 그립다.

 봄엔 진달래가 만든 분홍 빛으로, 여름엔 초록으로, 가을엔 
색색의 단풍으로, 겨울엔 흰 눈으로, 사계절 멋진 풍경화를 
그려내던 앞 산이 있는 고향이 몹시 그립다.

 고향엔 이제 엄마도 안 계시고, 감나무도, 엄마의 정원도 없다.
작아진 앞 산 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향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예나 지금이나 돌아 오지만 
엄마는 돌아 오시지 않는다.

 새로 지은 컨테이너 집엔 사진이 된 엄마가 벽에 걸린 체
희미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