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겁도 없이 말씀이야
부부가 꼭 마음에 들어서만 같이 사는 건 아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내 경우에는 그렇더라는 말씀이야. 그러고 보니 내 주장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듯해서, 항변을 들을라 싶으니 내 얘기나 해야겠다. 나도 많이 늙기는 늙었나 보다. 누군가의 항변이 무서워서 우물쭈물하다니. 참, 만석이도 이젠 한 물 갔네. 솔직히 나이가 들고 보니 주녹이 드는게 사실이다.
영감이 병원출입이 잦아지자, 아이들이 권해서 사무실을 넘겼다. 운전도 그만 두는 게 좋겠다고 해서, 운전면허증도 반납을 했다. 사무실을 접고 집에 들어앉아서는, 만나던 친구나 지인들도 피하는 눈치였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이었겠다. 급기야는 세워 둔 차도 넘겨버렸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영감이 많이 의기소침(意氣銷沈)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영감은 하루아침에 삼식(三食)이가 되어버렸고, 뚜벅이에 순둥이로 변해버렸다. 순둥이로 별할라 치면 깡그리 순둥이가 되든지. 부리던 고집과 아집은 변할 줄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밥상은 마누라에게 맡겼으면 싶은데 그게 되질 않았다. 다른 건 다 말이 없는데 밥이 문제였다. 잡곡이 섞인, 소위 말하는 영양잡곡밥은 도통 입에 넣지를 않았다.
영감은 본인 말대로 깡시골 촌놈이었지만, 집에서는 여덟 시누이 중의 큰댁오빠로 군림했다. 가마솥의 잇밥은 조부모보다도 먼저였고, 시아버지보다도 먼저였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모든 일에서, 당신의 외아드님(내 남편)을 우선으로 하게 만들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아버님은 일꾼들과 겸상을 해도, 외아드님은 시할아버지와 겸상을 하게 하더라는 말씀이야.
이로서 평생을 가마솥에서 방금 퍼낸, 기름기 자르르한 밥만을 고집하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그리하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 줄 알고, 나도 그 입에 맞춰지더라는 말씀이야. 서울 살림을 하면서도 그 짓(?)은 이어졌다. 내가 밥을 짓지 않으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절감하지 못했다. 가사도우미(옛날엔 식모라고 했지)를 썼고, 나는 아주 잘 나가는 케리어우먼이었으니까.
그러던 중에 내가 병을 얻어서, 현미에 잡곡을 섞어서 먹으라는 오다가 의사로부터 떨어졌다. 이쯤 되면 영감도 동조를 해 줄만도 한데, 도통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크게 역정을 내거나 소란스럽게는 하지 않으나, 밥에는 숟가락도 데지 않고 술을 찾았다. 가벼운 뇌경색으로 병원 출입을 하던 영감도 환자였으니, 사실상 술은 금물이었는데 말이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는 영감이 술 마시는 건 딱 질색이었다.
‘모든 걸 다 양보했으니, 잡곡밥만은 내가 양보하자. 이러다가 과부가 되겠는 걸.’ 다시 돌솥을 장만하고 잇밥을 지었다. 참 희안한 사람이다. 반찬 타박은 절대로,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딴지를 거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유독 밥에만 고집을 부렸다. ‘그래. 그게 나를 이기는 그이의 하나 남은 자존심일 수도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 뒤로는 나도 쉽게 잡곡밥 먹이는 걸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도 백수가 되고 보니, 돌솥밥 짓기가 군일 같았다. 그러지 말자 하면서도 한 끼에 두 종류의 밥을 차리는 게, 갈수록 꾀가 나더라는 말이다. ‘영감의 밥은 어쩔 수 없으니, 내 밥을 한꺼번에 많이 해 놓고 데워서 먹는 방법’을 강구했다. 전기밥솥에다 많은 량의 밥을 지어서, 위생봉지에 나누어서 냉동실에 넣었다. 다음 끼니에 2분만 데우니, 새로 지은 밥 같았다.
주말에 다니러 온 막내딸이, 위생봉지에 담겨진 주먹밥을 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다음 주말에는 한 끼니용 예쁜 용기를 사들고 왔다. 전자렌지용 식기도 내놓고 한참 설교를 했다.
“이건 프라스틱이니까 전자렌지에 그냥 데우면, 몸에 좋지 않은 독성이 나와요. 그러니까 데울 때는 꼭 여기에다 옮겨서 데워 드세요.” 후후후. 요럴 땐 자기가 내 엄마만 같았다. 요리 아무진 건 뉘 집 따님이신고 ㅎ~.
참 좋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걸 절감한다.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가 있다는 말이지. 이제는 영감도 아침에 내 밥을 손수 챙겨서 내 놓는다. 나도 이제는 돌솥밥 짓기에 심술이 나지 않는다. 진즉에 이리 했더라면 얼마나 좋아. 이젠 밥 짓는 일이 그리 귀찮지가 않다. 우리 집 삼식이도 세끼 밥 얻어먹기가 그리 눈치스럽지도 않겠구먼. 백수가 겁도 없이 말씀이야 킥킥킥.
만석이의 일주일 분 식량입니다. 좀 게을러서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