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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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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출신 할머니는 피곤해


BY 만석 2020-12-21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책상 앞에서 컴을 열었는데, 바로 그때 아래층으로부터 손녀딸아이의 피아노 건반을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던 일을 닫고 가만히 앉아서 피아노 소리에 심취한다. 지금 초딩 4학년이니까, 손녀딸아이가 피아노 건반을 만진 지가 벌써 4년이 되나 보다. 제법 곡이 부드럽게 흐른다. 이제는 건반을 다룰 수는 없게 되어버렸지만, 들을 줄은 안다는 말이지. 케케케.

내 손녀는 아마 고개를 갸웃둥거릴 것이고, 그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건반 위를 나르고 있을 게다. 뛰어 내려가서 힘껏 안아주고 싶은 욕정을 달랜다. 한참을 술에 취한 듯 소리에 취해 있는데 피아노 소리가 끊긴다. 얼른 폰을 찾아 손에 든다.
"할머니 손녀는 피아노도 잘 쳐요. 일취월장했구먼. 늙은 할미가 혼자 듣기엔 너무 아까워. 너무너무 황홀해." 문자를 보낸다. 손녀딸아이의 답을 얼른 듣고 싶어서 폰은 열어 놓은 채로다.

잠시 뒤, 아주 잠시 뒤에 문자가 날아오는 모양이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이~ㅇ? 이게 고 작은 숙녀가 만든 문장이란 말이던가.  아이구야~. 그새 이렇게 컸구나 싶어서, 들여다 보고 또 다시 들여다 본다. 감탄을 하면서도 더는 기다리지 않고 폰을 닫는다. 어린 것이 할미랑 대화하는 게 뭔 재미겠나 싶어서,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나는 아이와 긴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아이를 보는 듯 나는 폰을 열어서, 조금 전에 아이가 보낸 문장과 내 문장을 다시 읊는다. 아무리 보아도 아이의 문장이 어른스럽다. 에~ㅇ?! 그런데 이게 뭐람. 내가 보낸 문장에 오타가 왠말인가. 아직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오타는 그때그때 바로 잡아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새겨버리니까. 아이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할머니에 대한 맹신이 있다. 할머니가 하는 일은 언제나, 무조건 옳다고 믿어버린다는 말이지. 그런데 오타를 보냈어? 안 되지!

화들짝 놀라서 다시 폰을 든다. 마음이 급하다. 분명히 나는<일취월장>이라고 자판을 두드렸는데, <일치월장>으로 되어 있다. 이러면 안 되지. 요새로는 한문도 배우는 중인가 보던데.
"좀 전에 할머니가 보낸 문장 중에 오타가 났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안하다는 문자와 함께, 할미가 늙어가는 징조임을 핑계 아닌 핑계로 대니,
"괜찮아요 할머니. 저도 아직 많이 실수하는 걸요."라고 문자가 온다. 이게 초딩 4학년의 문장이라고? 아직 어리디 어린 아가라고 생각했는데... . 어느 집 손녀딸인고. 고것 참 영특하다 ㅎ~.

"바로 알아 두고서 너는 실수하지 않도록! 알았지? 일취월장이다. 알았지?!" 확실하게 쐐기를 밖아 둬야 잊지 않겠기에 힘 주어 문자를 다시 보냈더니,
"옙! 잘 왜워 둘게요."라고 다시 답이 온다. 시원찮은 내 눈 탓일까 하며 다시 눈을 비비고는,
"아니다. 왜워가 아니라, 외워다. 바로 잡아라." 문자를 보냈겠다?
아이는 곧 경쾌하게 경례를 올려 붙이는 곰돌이 리모티콘과 함께,
"옙!"하고 답을 보낸다.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걸 보니, 정말 이제 다 컸네.

"하하하. 국문과 출신 할머니는 피곤하지? 잘자거라~!"
"아니에요. 저는 제가 틀린 것도 제대로 잡아주시고, 저를 많이많이 사랑해 주시는 제 할머니가 너무너무 좋아요! 할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긴 문장을 보낸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사실은 아이가 보낸 끝 문장의 '아니에요.'는 '아니예요.'가 옳다고 바로잡아 주어야 하지만, 차마 폰을 다시 열지는 못하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 너무 잘 난 척하면, 아이도 식상할 수가 있으니까.
                                         (할아버지 생신날, 첼로연주로 생신을 축하하는 손녀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