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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극락세계


BY 가을단풍 2020-09-04

친정 아버지 뒤를 이어 이번에는 시어머니께서 극락세계로 발길을 돌리셨다.
안타까움와 분노가 맞부딧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끔 감았다.
코로나 속에서 친정아버지와 시어머니께서 약 백일을 전후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예전에는 이를 보고 "복상제"라 불렀다. 중복 된 상제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시어머니가 가신 길은 슬펐다.
당신 생전에 원하던 삶을 그림 그리 듯 그리고 싶으셨건만 불행히도 그 욕구를 충족 시키지
못하고 극락으로 가신 것이다.
잘 살던 시어머니의 친정 형제들이 무너졌다.
서울대 출신의 남동생이 일찍 돌아가시고, 조카는 미국 어딘가에서 그럭저럭살고 있으며,
여동생들과도 금전관계로 원한 관계가 되었다.
우리 시어머니 노후 자금을 후딱 떼어 먹은 것이다.

   자녀 또한 그 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이남 삼녀 중 큰딸 하나만 빼놓고 네명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 역시 일반 적으로 행복한 부부가 아니었으며,
작은딸은 남편이 40대부터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사회와도 단절 되었다.
막내딸도  딸이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서 별거를 시작하여 아직까지도
별거중이다.
막내 아들은 동서와 별거하여 15년이 훨씬 넘게 살다가 몇년전에 다시 돌아왔다.
 
  우리 어머니 인생은 두엄내가 풀풀 났다.
여자로써 인생으로써 동정이 많이 갔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분노로 표출되어 나에게 화살을 꼽았다.
작은 며느리는 별거중이었기때문에 그에게는 화살을 박을수가 없었나 보다.
그러나 보니 내가 고스란히 내가 받을수밖에 없었다.
 
  우리 고부는 때로는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울기도 했다.
서로의 아픔을 안아 줄 줄도 알았다.
그러나 해가거듭하면서 자꾸 삐그러져가고 있었다.
나의 약점은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정이 살만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공부를 악착같이 시키는 것이다.
남편이 돈은 벌어다 주었다.
그러나 그는 늘 자기 형제들과 많은 삶을 공유했다.
그리고  늘 밖으로 돌았다.

  부모의 입장에서 본 아들 며느리는 아들이 없는 것이 엄청난 분노였나 보다.
그것을 약점으로 나를 미워했다.
늦게 태어난 막내딸을 박대하였다. 그러는 사이 두딸과 나도 함께 버려졌다.
우리 사모녀의 분노를 남편이과 시댁 형제들이 아주 잘 알고 있다.

  세딸이 오롯이 자라 한양으로 학교를 갔다.
이곳 소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많큼 힘들었다.
그러나 눈이 부시게 예쁜 딸들이 그렇게 자란 것이다.
나는 시부모님의 미움과 밖으로 도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친정에 정을 붙일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교생활과 취미 생활로 극복하여 아이들을 열심히 기른 것이다.
8년동안의 투병끝에 친정어머니 돌아가시고 친정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울밖의 남편을 처다보니 한없이 낮설었다. 시부모를 슬쩍 올려다 보았다. 암담했다.
다시 정을 들이기에는 너무나 먼 타인 같았다.
그래도 신혼시절 옛 사랑 때문에 시부모를 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받았던 기억이 떠 올라 마음이 쓰라렸다.
안타까움과 분노가 엇갈렸다.
그래두 나름 시부모님을 잘 모시려 했는데 후딱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삼오제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한마디 했다.
"당신 시어머니 설움 많이 받았다."하고 말했다.
엄마 돌아가신 슬픈 남편에게 할 말을 할수는 없었다.
찰지게 내려 앉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그 시대 노인들 다 그렇지, 당신 엄마가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사람이다."

  오늘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주가 조금 지났다.
자기들 형제끼리 만 일주일 간격으로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배우자는 따를 시켰다.
나는 그들이 워낙에 밀착 관계에 있는지라 자기 형제들끼리의 공유를 배려했다.
매주 목요일은 홀로계신 시아버지의 돌보미 당번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빈 자리는 내가 '왕이' 되었다.
다만 애들 아버지를 내 남편이라는 생각만 버리고 그들의 형제라는 생각만 갖으면 된다.
태평성대가 되었다.
우리 시아버지는 나를 미워해도 한방이면 끝난다.
나는 시아버지를 침대에서 밀어내고 코를 딩딩 골며 잤다.
우리 집에서 보다 더 잘 잤다.

  우리 남편은 시부모의 박대를 받았음에도 내색없는 나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는
느낌을 받는다.
시누이들과의 관계는 향상 좋았다. 동서와의 관계도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나를 "도인"이라 불렀다.
아! 나 도인 맞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시누이들 하고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으니까.
우리 친정 부모를 그렇게 미워하던 시아버지는 풀이 푹 죽어 연신 알아 듣지도 못
하는 말씀을 계속 하셨다. 그것이 "치매"라는 것이다.
귀도 상당히 막히셨다.
텔레비젼 음량을 30이 넘게 틀어 24시간 왕왕 댔다.
방구를 뿡뿡껴도 못들으시고 코를 딩딩 골아도 탓을 하지 않으셨다.
아 좋타!
다만 기분이 살짝 나쁘다면 아버님 어머님이 살고 계신 동래 사람들 모두가
나를 나쁜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동내 주민들이 삐죽 삐죽 들여다보면서 "너 나쁜 년이라매.........."하는 눈치를 받는다.
요양보호사 역시 나를 "너 나쁜 년..."하고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화는 났다.
"저것들을 그냥 다 털어내."
나의 도가 덜 익어서 풍장을 쳤다.
오늘 아침 일찍 동내 가계 주인을 만났다.
"그래도 여기를 오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아 참 어제는 술주정꾼 아저씨가 말했다.
"아줌니가 여기 오니께 좋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한마디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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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안나.
내가 입만 열지 않으면 우리 집안은 모두 태평 성대가 된다는 것을..........................................

딸들에게 문자를 했다.
너희들 할아버지 되 찾아가.
어린 시절  옛 사랑을 돌려 들여라.
너희 들을 미워한 것은 할아버지 의지가 아니니라.
아들 딸 차별도 없고
친손 외손 차별도 없고
손자 손녀 차별도 없는 분이 너희들 할아버지다.
다만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함께 움직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답장이 왔다.
"엄마 할아버지 돌보려면 힘들텐데 "태평 성대"라니까 좋네.

우리 친정 어머니 아버지를 미워한것은
며느리가 자기 것인데 빼앗겨서
사돈에게 빼앗긴 분노때문에 그랬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 아버지 돌아가시고 탈상 하던날  시댁 형제들을 모두 불러 밥을 사주셨다,
나는 이때 시아버지 마음을 보았다.
"너 내꺼 였어."
이제 돌아 왔구나..........................................................................................................................................................................
잘 왔다.

  삶을 아름답게 마감하지 못한 시어머니가 안쓰러웠다.
조금만 내려 놓으셨더라면 불행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련 만 돌아가실때까지도
마음을 응등 그리고 사시다 가셨다.
인간적으로 보면 나쁜 사람이 아닌데 나와의 인연이 나빠서 그랬던 것 같다.
가엾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