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두바이에서 살때 시부모님께서 다녀가신 적이 있다. 그 당시 아이들 놀이터에 손자들 데리고 나오신 시어머니를 본 어느 선배가,
"어머나, 어머님 연세가 60이 넘으셨을텐데 세상에 어쩜 그런 눈을 갖고 계시지? 그 나이에도 저런 영롱한 눈빛을 가질 수 가 있나? 아주 맑고 초롱한 사슴 눈을 가지셨네!"
라고 감탄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이야 옛날과 달리, 살짝 처진 눈 꺼풀에 가려져 그 예쁨이 빛을 잃었지만, 젊었을때 남편의 눈도 시어머니와 꼭 닮은 예쁜 눈을 갖고 있었다. 남편과의 짧은 연애시절, 커다란 잠자리 안경 너머로 또렷한 쌍꺼풀 진 눈에, 성냥개비 몇 개씩이나 올려도 될 만큼 길고 짙은 그의 속 눈썹을 바라보며,
'아,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해 보지 않으면, 이 남자가 이렇게 예쁘고, 게다가 청초하기까지 한 눈빛을 갖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를거야.'
라고 생각하며 나보다 더 예쁘고 맑은 남편의 눈을 말 없이 바라본 적이 있다.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같은 회사에 다녀서 얼굴이야 알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만난지
두 번 만에 청혼을 받고 덜컥, 결혼 약속을 한데는 아마도 남편의 그 눈이 크게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남편의 눈이 시어머니 눈을 꼭 닮아서 였을까, 남편 집으로 첫 인사를 갔을때 시어머니가 낯설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가만 돌아보니 지금껏 시어머니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아마도 그건 결혼 이후 6개월만에 해외살이를 시작 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시어머니 성품상 며느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하시는 분은 아니신까닭이기도 하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야 비록 국내에 있지 않더라도 전화를 통해서나, 아니면 1년에 한 번 방문하는 여름 휴가때 얼마든지 싫은 소리를 하실 수가 있으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도 이런 시어머님한테 고맙고 감사해서 한국을 방문할 때면, 될 수 있는대로 시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아이들이 어렸을땐 아이들과 함께 시댁에만 머물다 출국한 적도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다 자라서 더 이상 나랑 함께 할 수 없을때도 꿋꿋이 혼자서 시댁 방문을 수 년째 이어오고 있다.
가끔 친구들이 시댁에 혼자 내려가는 나를 두고,
"얘, 불편하게 어떻게 애들도 없이, 남편도 없이 시댁에 혼자 가니? 너도 너지만 시부모님들도 너 땜에 오히려 불편 하실지 몰라."
라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사실 내가 비록 곰 같은 며느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우 같은 며느리도 못되기에 아이들이나, 남편없이 시부모님들과 몇날 며칠을 지낸다는것이 쉽지 만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댁을 찾는 것은, 본의 아니게 큰 며느리로서 해야 할 많은 책임에서 벗어난 미안함 때문이다. 방문하는 계절에 따라 농사일도 거들고, 비록 시어머니께서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일 망정 정성스레 차려 드린다. 그러는것이 큰 며느리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다는 마음의 빚을 더는것 같아 스스로 위안을 삼음도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시어머님이 아무래도 치매 증상이 있는것 같다며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겠다고 시동생이 전화를 했다. 가까이서 시부모님 잘 챙기던 시동생이 처음으로 이젠 해외 생활 청산하고 한국으로 들어 오셔서 부모님 모시면 안되겠느냐고도 했다.
매 주마다 안부 전화 드릴때 너무나 생생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셔서 전혀 이상한 낌새를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시동생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연세가 있으시니 당연히 한 번쯤은 생각해 봤어야 하는데, 설마 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몽둥이로 한 대 얻어 맞은듯 멍하다.
가끔 티브이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연로하신 부모님과 살기위해 시골로 내려와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다. 난 그들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왜냐면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마 큰 결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음이 복잡하다. 남편은 여기서 일하라 두고 우선은 나라도 한국으로 들어가야 되는건 아닌지....아무튼 시어머니 병원 다녀오실때 까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려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