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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효도!


BY 이루나 2017-04-12

  따스한 봄날에 꽃이 만개하면 엄마 손을 꼭 잡고 꽃구경 가야지 생각으로 만 몇 년째다. 구정 열흘 전 즈음인 내 생일을  58년 째 살고 있지만 우리 엄마가 기억해 주고 챙겨 준건 딱 한번 이었다. 내 나이 28세 때 네 살 배기 아들과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언덕에서 굴렀고  그 사고로 아이는 다리가 부러지고 나는 온 얼굴이 성한 곳 이 없도록  찢어졌다 . 영월 상동 재를 오르는 구불구불한 비탈길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3월의 볕 좋은 어느 봄날 밭을 일구던 농부가 사고를 목격하고 달려와 신고를 하고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주느라 자신의 목에 걸치고  땀을 닦던 수건을 내게 양보해 주었다. 가까운 태백의 장성병원으로 옮겨졌고 내 얼굴을 보고 놀라는 간호사들의  표정은 "무섭다" 였다.
  다친 아이도 있고 하니 가족에게 연락하라 길 레 엄마에게 연락 했는데 병원 측에서 내 얼굴이 무섭다고  얼굴까지 흰 시트를 덮어 놨었다. 엄마가 달려오더니 " 아이고메 죽었 는교? " 한다. 내손으로 시트 자락을 들춰내면서 " 엄마 나 안 죽었어" 하는데 내 얼굴을 보더니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주 기독병원으로 후송을 갔고 이듬해 몇 번의 흉터 성형을 했다.
   그해 겨울 팥 시루떡을 해서 머리에 이고 엄마가 나를 찾아왔다. 뭔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니 생일이잖나? 죽다 살았으이 생일 찾아 먹어야제" 처음으로 내 생일을 기억해서 챙겨 주었다.
   내가 열 몇 살 아주 어릴 때부터 음력 유월 스무엿새 엄마 생일을 한 번도 안 잊고 차려 드렸다. 둘째 언니와 함께 동네 아줌마들을 초대해서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놀고, 엄마는 받기만  하면서  내 생일 따위는 단  한번도  기억조차 못해 주어도 또 그게 당연한줄 알았다.
   내 나이 40이 넘고 생일에 미역국을 안 끓여 먹으면 인복이 없다. 라는 속설에 내 생일날 미역국을 꼬박 꼬박 끓여먹기 시작했다 . 40대 중반의 어느 생일 날 같은 아파트의 바로 옆 동에 사는 엄마에게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아침을 먹자고 전화를 했더니 싫단다. 당시 택배 노선차를 운행하던 남편이 밤새 운전을 해서 택배를 차고지에 하역해 놓고 집에 온지라 엄마까지 세 사람이 함께 아침밥을 먹자는 거였었다. 다시 한번 "얼른 와요 기다리고 있어"  했더니 그래도 싫단다. 왜 그러냐니까 춥단다. 내 생일 인걸 모르시나 하는 수 없이 " 엄마 오늘이 내 생일이야 그래도 엄마가 낳았으니 생산자 하고 같이 밥 먹을라 그러지 " 하자  " 알 어 니들끼리 먹어 " 하고는 띠띠 띠 전화는 끊어졌다 .
얼른 남편을 쳐다보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다 .
   몇 년 후 둘째 언니가 엄마랑 나와 우리남편 그리고  언니가 재혼한  아저씨 까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얘기가 나왔다. 몇 해 전 언니 생일날 그 아저씨 차로 언니 친구까지 셋이 함께 엄마에게 왔었는데 " 엄마 오늘 내 생일이야 " 엄마에게 얘기 했더니 " 응 그래" 건성으로 대답을 하더란다. 한참 후에 언니가 밥을 하려고 쌀을 퍼 내려는데 찬밥 많은데 뭣 하러 밥을 하냐면서 엄마가 화를 내더란다. 결국 찬밥을 먹고 서울로 가는 길에 언니가 울었다면서 웃으며 이야기 한다.
  그랬었냐고 몇 년 전 내 얘기는 이런 게 있었다고 얘기 했더니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기억도 안 나는 얘기라며 일축해 버리고 만 다 . 당신이 조금 이라도 불리한 얘기는 화를 내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그리고 다가온 얼마 전 내 생일 에 또다시 엄마의 기억의 부재로 앞뒤를 전후로 내게 전화해서는 막말을 퍼부었다.  서운하고 또 서운했다. 드라마나 책에서 엄마의 부재를 가슴 아프게 다룬 것들을 보면서 만약 우리 엄마가 죽는다면 나는 추억으로 아프지는 않겠다.  하는 생각을 하니 목젖이 아팠다. 나도 늙는 구나 . 섭섭해 하면 늙는 거라는데 ,,,,,,,,,,,
   작년 추석 무렵 엄마가 흔들리던 아랫니를 빼고 밥을 먹는 자리에서 음식물이 튀 길 레 눈짓을 했다가 그걸로 곤욕을 겪었었다. 그런데 구정 전 또다시 윗니를 뺐다면서 조카가 모시고 왔는데 이를 언제 해 넣을 거냐고 물었더니 절대로 안한단다. 그냥 두었다. 누구도 설득을 못 시키는 사람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샤워를 해야 하고 유난히 깔끔을 떠는 성격이니 입에서 자꾸 튀어나오면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라도 하겠지. 기다렸다.
  구정이 지나고 어느 날 전화가 왔다 . 이빨을 해야 하겠으니 전화하면 나오란다.
  몇 십 년 째 엄마의 오 분 대기조 이자 로드 매니저로 살고 있으니 그러시라 하고 며칠 후 엄마를 데리고 치과를 갔다. 임플란트 2개는 65세 이상 보조금을 주는 혜택과 함께 견적이 삼백이 나왔다. 치과 의사를 상대로 " 내가 나이가 몇 인줄 아느냐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그걸 하겠느냐 생각을  해봐라" 말도 안 되는 떼 짱 을 쓰고 있다.  의사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 길 레 얼른 눈짓을 하고 "엄마 의자에서 내려오세요." 하고는 " 선생님 저분에게 나머지 견적을 상담할께요."  하면서 엄마를 데리고 접수계로 나왔다.
병원을 나와서  "엄마가 언제까지 살고 그런 게 저 분들 한 테 뭐가 중요해요. 그냥 견적을 봐 달라니 본거지 말이 안 되잖아 " 했더니" 그러니까 안한다잖아 시끄러웟" 께겡이다.
  며칠 후에 우리 딸 생일이 다가왔다. 미역국을 끓이고 갈비를 하면서 아침에 학교에 가는 딸에게 카드를 주며 케이크는 네가 먹고 싶은 걸로 골라서 사오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딸에게 무심코 터져 나온 말이 "우리 ** 생일 " 얼른 정정해서 우리 딸 이름을 불러주며 얼버무렸다. 그랬다. 우리 딸과 지금 십 여 년 째 만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아들은 성이 다르다 딱 십년하고 하루 차이인 아들과 딸이다. 엄마가 보기 싫어 소식을 끊고 만나주지 않는 아들의 이름을 딸과 혼동해서 불러놓고 딸에게는 미안하고 아들에게는 죄인인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
  다음날 음식을 싸들고 엄마를 찾아갔다. 무슨 음식 이냐 길 레 우리 딸 생일 음식 안주해서 엄마랑 막걸리 한잔 하러왔지 했더니 그러잖다. 막걸리가 한 순배 돌고 엄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더니 해 보란다.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첩첩 산골 혼자 사는 독거노인도 이빨 빠진 노인네는 없습디다. 멀쩡히 자식 있는 노인네가 아래위에 대문니가 하나씩 빠져서 흥 냥 흥 냥 하고 있으면  친인척 경조사가 생겨도 엄마를 창피해서 모시고 갈수 있겠어요. 엄마가 잘 보는 내 고향 6시 그런 프로에도 이빨 빠진 노인네가 있던가요? 그리고 이 음식 우리 딸 생일 음식인데 **이 하고 하루 차이라 내가 이맘때만 되면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서 몹시 힘들어 아무 에게도 말 못하고 너무 힘이 드는데 왜 엄마까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내가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나 힘든 거 얘기한적 있어 ... 우는 내가 안됐는지 알았다고  미안 하다고 했다..그리고 며칠 후 또 다시 다른 치과를 방문 했는데 거기서는 안쪽에 어금니는 치료해서 발 치만 하고 앞에 대문니만 두개를 하겠단다.
   결론을 못 내리고 돌아온 후에 전화로 다시 얘기했다. 대문니는 보기 싫은 것 과 위생을 고려해서 하는 것 이고 어금니로 모든 것을 씹어 먹는 것 인데 만약 발 치를 하고 이가 없으면 모든 이들이 그 쪽으로 쏠려서 다 함께 흔들리다 보면 나중에는 더 많은 돈을 들여서 틀니를 해야 하니 그건 더 부담이 된다고 설명해서 겨우 허락을 받아 냈다. 그리고 다시 모셔간 치과에서 어금니를 빼고 이를 해 넣으신다면  따로 치료비를 안 받지만 안 해 넣으신다면 그때마다 치료비를 받는다기에 엄마에게 다짐을 받고 보는 앞에서 계약금으로 100만원을 모바일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어제 발치한 곳을 살펴 보기위해 다시 방문했는데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들어보니 내가 여기를 오려면 버스를 타고 내리면  우리 딸이 데리고 와야 하고 얼마나 번거로운지 아느냐 그렇게 왔는데 힐끗 쳐다보고 됐어요. 가요할거면 뭣 하러 불렀느냐 한꺼번에 다 해 줄 수 없냐 하면서 되지도 않는 억지를 쓰고 있었다. 데리고 나와서 " 저 사람들이 엄마를 볼 때 마다 따로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너무 예뻐서 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어제 뺀 이빨 자리가 잘 아무는지 상태를 보려고 부른 건데 왜 시비야  한꺼번에 확 해버리고 싶은 건 엄마 말고 저 사람들일거야 대체 왜 그러세요. " 묵묵부답 이다. 아 정말 내가 날개라도 돋길 기다리는 걸까?
  그리고 며칠 후 반대쪽 치료를 하기 로 한날 기어이 엄마는 오지 않았다. 전날, 전전날 계속해서 나에게 몇 번 이나 더 가야 하는 거냐고 묻길 레 많이 여러 번 이라고 했다. 며칠을 더 기다리다가 기어이 안하겠다는 본인의 의지를 확인하고 환불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근로복지공단 에서 발급한 카드로 직업병을 진단하는 대상이신 엄마를 모시고 서울을 가는데 곱게 차려입고 혼자서 시간표를 확인하고 차에 오르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왜 우리 엄마는 저러지 못하는가? 심란했다. 무릎이 아파서 3년 전 인공관절 수술을 했지만 당신의 덩치 때문에 별반 효과가 없었다. 올라가는 전철 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 하는데 대문니가 없는 엄마의 침이 내 얼굴 곳곳에 폭격을 가한다. 닦아 내고 " 엄마 조금 전에 내 얼굴에 엄마의 침이 탱크처럼 공격 한 거 알아요." 했더니 " 알아" 한다.
   병원에 도착해서 예전에는 2박 3일 입원을 시켜놓고 검사를 하 길 레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예산이 삭감 되면서 간단하게 엑스레이와 피검사 소변검사 세 가지만 해서 의심소견이 나오면  그때 입원 시켜서 검사를 한 다 길 레 " 우리는 입원 하는 줄 알고 준비해서 왔는데요. " 하자 엄마가 대뜸 나한테 " 네가 입원 한다고 했잖아 " 하신다. 내가 언제 그랬냐고 묻자 네가 그랬다며 또 다시 억지를 쓴다.  내가 전화를 해서 예약해야 되나요. 했더니 아니라고 공단에서 발급해준 카드를 가지고 원무과 들러서 2층으로 오면 된다고 하더라.  전했지 입원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설명해도 내말은 들으려 않고  혼자서만 흥분해서 떠드신다.
   당신이 불리한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난다. 못 들었다 하면서 그런 경우에는 내가 잘못 들었나? 해야 하는데 내가 입원 이야길 했다하며 마구 우긴다. 듣다 못한 간호사가 제지를 한다. 옛 말 에 나이가 들면 너그러워지고 지혜가 생긴다 했다. 그건 그냥 옛말일까 ? 그래 그건 60이 천수를 다했다고 믿는 아 주 아주  옛날 말임에 틀림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