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첫날 아들 윤이를 대학 기숙사에 데려다 줬다.
다른 엄마들은 기숙사에 올라가 자식이 생활할 공간이 어떤지 둘러보러 갔지만
난 윤이가 짐을 들고 올라가는 것만 보고 차 안에 앉아 있었더니
딸이 하는 말
“역시 우리 엄마야. 다른 엄마들은 아들이 살 기숙사가 어떤지 궁금해서 올라가 보는데
우리 엄만 달라.” 한다.
“하하하하~~ 올라가 본다고 뭐 달라지니? 여기까지 데려가 주면 됐지.”
윤이가 군대 갈때도 다들 눈가가 빨개가지고 울고 있는데 난 울지 않았다.
훈련병 때 입고 간 옷이 집으로 오면 그땐 누구나 운다던데 난 그때도 울지 않았다.
건강한 아들이면 다들 가는 곳이고,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번은 겪어야 하는 젊은 날의 숙제를
얼른 해치운다고 생각했기에 울지 않았다.
딸아이가 울지 않았냐고 묻기에
“울면 뭐하니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인데… 출근하기 바빠서 울 여유도 없었어.”
난 그날 출근시간이 늦어질까 봐 신경이 쓰였다.
행사가 길어져 출근하기로 한 시간에 못 맞출까 봐 마음이 좀 초조했었다.
난 직장 다니고, 살림하고, 아빠의 빈자리까지 채우느라 아이들 앞에서 힘들다고 울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친척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나는 힘들어 보이지도 않고,
외롭지 않냐고 묻곤 했다.
“괜찮아요. 인간은 누구나 외롭죠, 뭐.”
얘들 둘 키우려면 부부가 벌어도 돈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안 해서 그런가
친척이니 친구들이 내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그때마다 돈을 빌려줬다.
그래서 그런가 재혼한 친구가 하던 말
“나도 너처럼 능력이 되면 재혼 안했을거야. 난 혼자 벌어서 아이들 키울 돈이 없어서
재혼한 건데, 넌 돈이 있어서 재혼 안 한 거 아니니?”
나도 사실 돈이 없었다.
전세방 얻을 돈이 없어서 친정 엄마네로 들어갔는데 뭔 돈이 있겠는가.
나는 능력이 돼서 돈이 있는 게 아니고
돈을 쓰지 않아서 조금이지만 저축을 계속할 수 있었다.
번만큼 써야지 남들 하는 거 쫓아가다간 내 가랑이가 찍어지게 된다.
윤이가 고등학교 때였다.
자율학습 한번 빼먹지 않던 아이가 퇴근해서 오면 학교도 못 가고,
많이 아프다고 밥도 안 먹고 누워있곤 했다.
친정엄마가 오시더니 윤이가 다 죽어간다고 우셨다.
나는 그때 다니던 직장이 엄청 바빠서 휴가도 낼 수 없어서
동네 병원에 윤이만 혼자 보냈고, 그 병원에선 위가 나쁜것같다고만 했다고 한다.
친정엄마가 큰 병원에 접수를 해 놨다며 아이가 삐쩍 말라 해골 같은데,
병원 데리고 갈 부모도 없고, 하시며 자꾸 우셨다.
검사 결과 병원에서 이렇게 아프도록 놔 뒀다고 당장 보호자가 오셔서 입원을 시키라고 전화가 왔다.
A형 간염인데 간수치가 엄청 높다고 했다.
“제가 일을 해서요, 꼭 오늘 입원해야 하나요?”
“간수치가 너무 높아요. 당장 입원하세요.” 병원 측에서 기가막혀했다.
전화를 끊고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팀장에게 울고 있게된 사정을 말했다.
“그런다고 뭘 울고 그러세요. 얘들 아빠보고 입원시키라고 하시면 안되나요?”
“저….사정이 있어서 제가 가봐야할것같아요.”
“그래요? 엄마가 그리 약하면 되겠어요?”
약해서 우는 게 아니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아프다고 했는데도 혼자 병원에 보내고 돌봐주지 못해서 가슴이 아팠던 거였다.
그래 네가 뭘 알겠나… 다 내 사정이지.
아픈 윤이 앞에선 울지 않았다. 내 특징인 덤덤함을 발휘해 큰 병원엔 돈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작은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입원을 시켰다.
병원 측에선 간이 회복이 안되면 간이식까지 시켜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가슴이 떨리고 손발이 떨려서 아들아이에게 위로의 말도 못하고,
안그런척 차분하게 입원을 시키고 다음날 직장으로 출근을 했다.
낮엔 일하고 퇴근하면 윤이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출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기도를 하면서 한편으론 스스로 체면을 걸었다.
모자란 자식도 키우고, 반신 불구된 자식도 엄마는 키울 수 있다.
아무리 용서 못할 일도 엄마는 자식 편에 서서 이겨낼 수 있듯이
만약에 뭔 일이 생겨도 난 이겨낼 수 있고, 잘못된다고 해도 난 받아들이면 된다.
노란 몸둥아리, 시커먼 눈 밑, 뼈밖에 없는 팔 다리. 음식을 먹으면 토하고 설사를 해도
윤이 앞에선 울지 않았다.
다행이 간은 제자리를 찾아 회복을 하고 퇴원을 했지만 전염성이라 학교를 당분간 쉬고
두 달 만에 정상적인 고등학생이 되었다.
몇 달 뒤 팀장님 아들이 심한 감기가 걸려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팀장은 아이가 입원했다며 직원들 앞에서 평펑 울면서
아이가 아프니 넘 힘들다고 일도 손에 안 잡힌다며 마구 떠들어 댔다.
며칠 동안 휴가를 내서 출근도 하지 않으셨다.
그 팀장여자는 나보다 훨씬 어렸고 남편도 있고 심한 감기였을 뿐인데…
난 잘 우는 여자였다. 그러나 얘들 앞에선 울지 않았다.
울고 싶을 때,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내 마음을 자유롭게 놔 둔다.
그러면 복잡한 일들도
나뭇잎처럼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 듯 그 자리가 내 자리려니 받아들이면 된다.
울면 뭐하나 다 흘러가면 그만인데, 다 자연의 이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