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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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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무!


BY 이루나 2014-11-29

어릴적 소꼽놀이도 하고 땅따먹기도 하던 동무를 21년만에 만났다 . 

일년에 두어번 통화하고 문자로 가끔 안부를 물으면서  마지막엔 늘 언제한번

만나자는 말로 인사를  맺곤 했었다 .

 

올봄 세월호가 터진 직후에 원주에서 셋이 만났다 .

나는 춘천에 친구는 서울에 또 한친구는 태백에 살다보니 함께 만나기는 

원주가 가장 제격 이었다 .

 

서울사는 친구는 우리딸이 7개월 됐을때 4살 아들과  2살 짜리 딸을 업고서

춘천을 왔었다 . 7개월된 딸을 업고 터미널로 마중을 나가 우리 집으로 왔는데

이틀밤을 자고 간다더니  하룻밤을 자고나선  다음날로 가버렸다 .

 

4살짜리 아들은 사내 아이라 그렇다 치고 2살짜리 딸도 여간 산만한게 아닌지라

자기가 정신이 없어서 안되겠단다 . 섭섭함을 뒤로 하고 배웅을 했는데 얼마후에

난감한 소식이 전해졌다 . 아이가 고열로 응급실을 오가다가 장애가 있는걸

발견 했단다 . 그제야 아이가 지나치게 산만 했던게 이해가 됐다.

그후로 아이를 데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갖 치료를 다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단다 . 

 

그때 보고 21년만에 만나 원주 한지 공예관과 오크벨리로 하루를 돌아 다니고

셋이서  이른 저녁을 먹고나서 앞으로는 자주 보고 살자면서 섭섭하게 헤여졌다 .

 

그후.... 서로 카톡을 하며 안부를 묻다가  단풍이 아름다울 때 만나자는 대화를

했었는데 11월 첫주 만나자는 내 제의에 태백에 있는 친구가 바빠서 못온단다 .

 

서울 친구에게 춘천으로 오라고 하곤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소양댐을 거쳐

청평사를 가는 코스를 택했다 . 볕좋은 가을날 함께 오르면서 친구가 하는말

서울서 한시간 십분이면 오는 거리를 왜 20년 만에 만났니 ? 우리 참 바보같다 !

하며 웃었다 . 그 친구 엄마와 우리 엄마도 친구였다 . 서로 엄마들의 안부도 묻고

올라 가면서 사진도 찍고 청평사에 도착해서 못 하나 박지않고 나무로만 짜 맞춘

건축물 이란 내 설명에 절을  살펴보던 친구가 감탄을 한다 .

 

내려 오면서 단풍이 아름다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가을을 즐기고 풍광 좋은곳에

자리한 마루에 올라앉아 비빕밥과 동동주를 시켰다 . 막걸리를 먹으면서 친구가 하는

말이 " *란아 내가 우리딸을 보면서 왜? 나한테 했었는데 이젠 알거같아 왜? 는 없어

그럼 암 걸린 사람은 다 왜 ? 나한테 여야 하잖아 그래서 모든걸 받아 들였어  나는

자살을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만약 내가 가야 할때가 온다면 우리 *영이는

내가 데리고 갈라구 어느 방송 프로에서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해서

 데리고 가는 거라고 가장 나쁜 짓이라고 하더라만 나는 나머지 식구들도 내 소중한

가족이니까 그런 선택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 친구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

 

친구가 지금은 요양원에서 조리원으로 10년 넘게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서 청과물을 선별하는 알바를 3년넘게 했었단다 .

그 당시 친구의 집이 가락동 시영 아파트 였다 . 이웃에 혼자 살던 할머니가 있었는데

40년전에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위자료 400만원 을 받고 이혼 당하신 후로 혼자

외롭게 사시던 분이었는데 청과물 도매점에서 나오는 과일중 팔지 못하는 파치들을

드시라고 날마다 챙겨다 드렸단다 . 입주 당시에 300만원 남짓주고 들어간 시영

아파트가 30년 만에 최고가 5억 2천을 받고 팔고 난후 할머니는 유일한 혈육인 언니의

아들인 조카에게 의지를 하겠다며 대구로 이사를 가신후에 할머니께서 친구에게 자꾸  

한번 다녀 가라길레 어떻게 사시나 궁금 하기도 해서 서울서 이웃하던 할머니 한분을

모시고 갔었더란다 .

 

대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변두리 25평짜리 아파트 인데 발코니에서 내려다 보니

노루가 뛰어 다니는 시골 이더란다.  

하룻밤을 자고 나오는 길에 할머니를 직접 드리면 안받을것  같아서 화장대 서랍에

10만원이 든 봉투를 올려 놓고 나오는데 할머니가 차비라도 해서 가라면서 수표를

한장 건내길레 주시는 성의니까 감사히 받아서 왔는데 다음날 남편이 외식을 하러

가자길레 " 그래 내가 살께 나 할머니 한테 용돈 받았어 하면서 꺼내어 보니 십만원

권이 아닌 백만원권 이더란다 .

 

당장 할머니 한테 전화를 해서 " 할머니 백만원권을 십만원권인줄 알고 잘못 주셨지요? '

했더니 아니라고 큰애 대학 가는데 책 값이라도 보태 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더란다 . 혼자 살면서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것도 아끼며 사신 할머니에게 큰 돈을

받고보니 마음이 쓰여서 시장에 나가서 가끔 제철 과일이나 몸에 좋다는 것을 구해다가 

택배를 보내 드리곤 했었는데 어느날 통장에 할머니가 백만원을 입금을 했더란다 .

 

그래서 또 열심히 뭔가를 구해서 부쳐 드리고 그렇게 몇년이 흐르면서 할머니에게

모두 400만원이  입금이 되었는데 어느날 요양원에 할머니 한분이 오셨는데 고운

개량한복을 입고 왔더란다 구입처를 물어더니 **백화점에서 사셨다길레 그걸 사서

부쳐 드렸더니 전화가 왔더란다 내가 너한테는 말 해야겠다 나 폐암 이란다 6개월

남았다는데 이런거 나한테는 소용도 없으니 이젠 부치지 마라 하시길레 놀라서

내려 갔더니 할머니가 대구로 가실때 집 판돈은 그대로 두고 그냥 할머니가 갖고

있던 돈으로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를 8천만원에 구입 했는데 이제 얼마 안남았다고

하니 할머니 다니던 교회에 1억을 기부하고 불우 이웃돕기 재단에 1억 조카를 1억

또 1억은  그동안에 쓰셨고 남은 1억으로 돌아가실때 까지 병원비로 쓰실려고

남겼는데  현재 살고있는집은  돌아 가신뒤에 조카에게 상속하면 혹시 세금이

나올까봐 조카를 불러서 매매 하는걸로 부동산에 위탁해서 서류를 쓰자고 했더니

조카가" 그럼 계약금을 걸어야 하는데 계약금도 이모가 내실거지요 ? ' 하더라나?

그건 계약금까지 먹겠다는 거냐면서 할머니가 서운해 하시더란다 .

아마도 그 조카는 이모가 현금 5억을 들고 왔을때 언젠간 다  줄거라는 기대감 으로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 어찌 됐건 그 후로 친구가 인터넷을 뒤져서 폐암에 좋다는

약들을 꾸준히 보내 드리고 수시로 안부 전화를 했는데 얼마전 천만원이 입급이

됐더란다 .전화를 해서 치료비를 남기셔야지 어쩌시려고 그려냐 했더니 1억이

남았는데 충분하다 하시더라 면서 돈을 자꾸 받으니 부담 스럽단다 .

 

오늘 그 친구는 대구로 간다했다 .

외롭던 할머니의  인생에 따스한 기억들을 심어준 내 친구가 진정한 성자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