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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이 쓰는 편지(9)


BY 편지 2014-11-24

나는 아버지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오래 갖고 논 퍼즐조각 같아서

뒤죽박죽 섞여있고, 많은 부분이 없어져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아버진 직업군인이었다.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골짜기에서 근무를 하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눈에 들어 자신의 셋째 딸과 결혼을 시키게 되었고,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살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의 모습이 어릿어릿 보이기 시작하는 곳은 대구다.

군복 입는 남자들이 보이고,

어느 아침에 나를 보며 웃던 온화했던 모습과

자란지 거북이인지 그걸 보여주던 장면이 보인다.

흑백 사진 속 아버지는 배우처럼 잘 생겼고,

키가 180센티미터나 되는 장신이었다고 한다.

맹호부대, 월남, 파병...알 수 없는 단어들이 떠돌고,

단편소설처럼 이어지지 않고 끊어졌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열기가 느껴졌던 부엌, 연탄불에 얹어진 음식, 좁은 창문으로 큰골목이 보였고,

또 군인들이 왔다 갔고.

파병으로 떠날 때 아버지의 모습은 어땠을까? 난 모르겠다.

 

아버지가 월남으로 떠났고 엄마는 막냇동생을 임신하고 있었다.

막냇동생을 낳기 위해 외갓집으로 갔고, 큰이모네 집에서 엄마는 아들을 낳았다.

진달래꽃이 산마다 언덕마다 피던 봄날이었고,

난 엄마 품에 안겨있던 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큰 이모네 집 뒷담으로 산수유 꽃이 노랗던 기억이 아득하게 겹쳐진다.

어머니가 막냇동생을 낳고 아버지에게 보낸다고 발가벗겨 찍은 사진도 아스라하게 보인다.

 

다시 대구. 그날 군복을 입은 세 남자, 두 남자였나...

아버지와 군인이 리어카에 국방색 나무상자였나...실고 우리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파병생활을 마치고 오던 날이었다.

상자 안에 있던 국방색 통조림이 집안으로 옮겨졌다.

선반에도 통조림, 방구석에도 통조림, 부엌찬장에도 양념 통 옆에 통조림이 가득했다.

그 안은 더 신기했다. 아주 달콤하고 촉촉한 빵,

짭짜름한 과자, 여러 종류의 초콜릿, 타일 같고 바둑알 같던 껌.

그 통조림을 다 먹을 때쯤에

저만치 언덕배기에 학교가 보이는 문방구점방으로 이사를 갔다.

이발소를 개조한 곳이라 하얗고 까만 타일이 박힌 물받이가 부엌에 있었고,

그 옆으로 방문이 있었고, 그 방안엔 아버지가 이불을 덮고 누워 계셨다.

어머닌 막냇동생을 업고 장사를 하시고, 타일 박힌 물통 물로 음식을 하고 약탕기에선 약을 끓고,

아버진 그 쓴 약처럼 쓴 얼굴을 하시고 약을 마시고 그 약 그릇을 획 집어던졌고,

난 언덕에 있는 초등학교로 입학을 하고,

어린 나이었지만 문방구 안이 약냄새로 꽉 차서 뭔가 불안했고...이모들이 오고...

난 겁에 질려 눈치를 봤고,

그리고선 우린 아버지를 모시고 외갓집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게 되었다.

 

아버진 많이 아팠다. 병원을 가기 위해 산 고개를 넘어 가던 모습이

자주 끊기는 흑백영화 같지만 그 내용과 끝을 짐작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엄마랑 동생들이랑 잘 살아야한다. 네가 맏이니까....”

그게 무슨 말인지 난 모른다. 어렸지만 맏딸이 싫었다.

아버지가 아픈 것도 엄마가 홀로 남은 것도 어린 동생이 둘이나 되는 것도

다 내가 맏이라서 일어난 일인 것 같아서 넌 맏이니까, 하는 말이 정말 싫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더웠다. 옥수수 잎이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와

콩잎이 더위에 지쳐 오그라들던 날이었고,

동생이랑 밭 옆 도랑에서 놀고 있었다.

큰 이모가 오시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이제 어쩌니, 하시면서 스르르 쓰러져 우셨는데,

어디서 떠드는 새소리인양 난 먼 산만 쳐다보았다.

 

장례식 날이었다. 엄마 울음소리가 천지사방을 울렸다.

할머니와 큰 이모가 엄마를 부여잡고 목이 끊어지듯 울었다.

큰 냇물을 지나 산 중턱쯤에 아버지를 구덩이에 넣고 흙을 덮으며

동네 사람들이 어이어이 하면서 아버지를 꽉꽉 밟았다.

아버지를 묻고 내려오는 길에 누군가 나 들으라고 한말인지 모르겠지만

저 년이 아버지를 잡아먹었어.” 했다.

난 울지 않다가 그 말 때문에 울면서 산을 내려왔다.

 

아버지 형제에겐 딸이 없었다.

아버진 큰딸인 나를 낳고 대단히 기뻐하셨다고 한다.

날씬한 다리를 만들어 준다고 매일 다리를 주물러 주었고,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나만 찾으셨다고 한다.

.... 한 땐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왜 내가 맏딸이 되었는지.

이 험난한 세상에 왜 엄마를 홀로 남기셨고, 또 나까지 혼자가 되게 하셨는지...

그러던 중 친정집에서 아버지의 수첩을 발견하게 되었다.

국방색 작은 수첩엔 시가 몇 편 적혀 있었는데 자작시인 것 같았다.

어떤 시였는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그 수첩도 이젠 없어져 버렸지만(그 자리에 잘 두었는데, 그 뒤 본적이 없다.)

그 시를 보면서 아버지도 나와 같이 감성이 풍부했던 분이셨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문학적인 면을 나에게 물려 주셨구나, 했다.

큰 키와 날씬한 다리와 외까풀이지만 예쁜 눈을 아버진 나에게 물려주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군복과 아파서 누워있던 모습 두 가지로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