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에 형광등이 깜빡 거려서 눈이 아프다.
예전 같았으면 의자를 놓고 올라가는 일을 주저 하지 않았지만 이젠 삼가하기로 한다.
머리맡 스탠드로 대신하며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그리 지내기로 마음 먹는다.
요즘은 시청에서 독거노인 보살핌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신청을 하면 형광등도 갈아주러
온다고 한다.
이 독거노인이 집을 지키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신청을 할수가 없는게 문제다.
월화수는 복지관에가고 목요일엔 지하철을 타고 당산동에 간다.
당산동 고모님은 목요일만 기다리신단다.
사촌동생이 시장 보아 놓은 자료로 몇가지 반찬을 만든 후엔 고모와 산보를 하고 화투를 치며 놀아드리는것이
전부다.
\"언니가 만들어놓은 봄동겉절이가 너무 맛있어서 우리가 이틀만에 다 먹었다는거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 봄동을 사놨어.
또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오케이.\"
\"언니 깍두기 정말 일품이야.\"
내겐 네가 있잖니.
고모가 요즘 내게 잘 하시는 말씀이다.
그 말에 웃는다.
필요할때는 그리 말씀 하시는것 같다.
\"죽을때가 되었나봐. 경주에 있는 동생네 가보고 싶어. 집에 불이 나서 물건이 홀랑 다 탔다는데도 한번 가보지를
못해서 마음이 쓰여. 이번에 새로 아파트를 샀다는데 궁금해. 나랑 경주에 안가볼래?\"
\"그러지요.\"
\"정말이지?\"
\"정말.\"
\"가서 일단 호텔을 잡아 머물면서 전화를 하는거야. 그리고 근사한 밥을 사주고 다음날 집에 가보는거야.\"
\"그러셔요.\"
\"돈은 얼마나 가져가면 될까?\"
\"많이 가져가세요.\"
\"얼마나 많이?\"
\"아주 많이.\"
내 말에 고모가 크게 웃는다.
당산동 고모보다 여섯살이 아래인 경주고모는 젊은 시절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연락두절로 살았지만
이제 팔십이 넘고 보니 다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죽을때가 되어서 동생네 가 보고싶다는 말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다음주 목요일 아침 열시반에 출발하는 KTX를 예약했다.
\"월요일엔 복지관 출근을 하니까 오래 있자고 하진 말아요.\"
\"알았어. 이박삼일만 있을께.\"
고모는 입고 갈 옷과 가방을 보여주며 소풍가는 어린애마냥 들떠 있었다.
\"어께에 간단하게 메고 갈 생각만 하세요. 가방을 내가 들어드릴수는 없으니까.\"
\"알았어. 잠옷만 가지고 갈거야. 나 요즘 피부 가려움증이 심해졌어.네가 타다준 약이 이제 얼마 안남았어.\"
\"그럼 지금 피부과에 갑시다. 약을 가지고 가야지요.\"
고모를 모시고 피부과에 다녀오는 길에 아파트 벤취에서 봄냄새를 맡았다.
\"남쪽에 매화가 피었을까? 경주에 간 김에 꽃구경도 하고 왔으면 좋겠다.\"
\"그건 가서 생각하기로 해요.\"
\"그래. 아..좋아라.\"
꽃구경을 할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들떠있는 고모를 보니 나의 역할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신 후에 후회가 없기위해서 추억 쌓기에 한몫하기로 한다.
아버지 생전에 못해드린 일이 생각나서 고모를 거절하지 못하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