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입니다.
도서관데스크 뒤 벽걸이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회전을 틀 때마다 드르륵 드르륵 기름기 없는 마른 소리가 납니다.
9월부터 이곳에 첫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력서를 내고 떨리는 가슴을 표시내지 않으며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계약직 서류에 사인을 하러 도서관으로 가는 길엔
천일동안 필 정도로 오래 핀다는
다소 과장된 이름을 가진 천일홍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습니다.
도서관은 나무가 많은 공원 초입에 있습니다.
서류를 내려고 처음 이곳을 찾아들 때는 숲이 우거진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했는데...
한명의 직원을 뽑는데 열 명 정도 이력서를 냈다고 하니 자신은 없었습니다.
세월소리가 나는 선풍기가 있고,
속이 보이기 시작하는 낡은 회전의자가 있고,
에너지 절약 실천으로 실내는 후텁지근하지만
나에게 도서관이란 곳은 흘러간 날의 향수와
앞으로 올 미래가 책처럼 말없이 있는 흐드러진 낭만과 운치가 있는 곳입니다.
오후 2시에 출근을 해서 밤 열시에 퇴근을 합니다.
출근시간엔 여전히 여름 냄새가 옷자락에 짙게 남아있고
퇴근시간엔 손가락부터 은은하게 가을 냄새가 올라옵니다.
오래전 어떤 높으신 분이 도서관에 오셔서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을 이용하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때부터 밤 열시까지 책을 대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계약직이 필요하게 되었답니다.
면접관이 최종합격자 네 명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서관에 일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냐고
(도서관에서 일한 경력자만 이력서를 낼 수 있답니다)
“우선 책읽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산골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꿈은 화가였습니다.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내 스케치북을 보시고 그때부터 매일 미술지도를 받았습니다.
남아서 그림 그리는 건 즐거웠지만
혼자서 산 하나를 넘어 집으로 가는 길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산 고갯길엔 공동묘지가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으니까요.
중학교 때는 꿈이 없었습니다.
빵을 좋아해 빵집을 하고 싶었나? 확실한 기억은 아닙니다.
부잣집 동네 골목을 휘휘 돌아 중학교가 있어서 부자가 되고 싶긴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꿈은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국어시간은 재미있었지만 수학시간은 고통스러울 만치 힘들었습니다.
수학시간만 되면 속이 울렁거렸고, 숫자와 공식이 쪼그라들어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내 번호만 불리지 않길 바라며 수학시간엔 독서를 하거나 글만 썼거든요.
내 잡다한 글 공책이 폭풍의 언덕처럼 돌려가며 읽혀졌으니까요.
폭풍의 언덕 작가처럼 강열한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신경숙님처럼 감성적이면서 자전적인 글을 쓰고 싶었지만
나의 글재주는 아주아주 게으르고 시답지 않았습니다.
글을 써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작가의 길은 꿈일 뿐 실현될 수 없다는 걸
차차 깨닫게 되었을 무렵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었고
도서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밀려든다는 걸 알면서
평상시엔 홍수환 선수를 손톱만치도 생각지 않던 내가
“칠전팔기라고! 너 아냐? 일곱 번 넘어져도 난 도전할거라고.”
두 번 도전해서 도서관 계약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곳 도서관 책들은 자유분방하더군요.
벌떡 누워있는 놈, 가랑이 쫙 벌리고 자빠져 있는 예술가,
몰래 숨어서 낮잠 자고 있는 청소년, 질서가 전혀 안 잡혀 있었습니다.
난 두루 뭉실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장갑 낀 손으로 놈을 꼼짝 못하게 똑바로 앉히고,
낮에 너무 자면 밤에 잠 안온다고 흔들어 깨워 가지런하게 놓았습니다.
엉켜있던 책들을 번호순대로 똑바로 놓으니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애쓴 보람이 있더군요.
왼쪽창밖엔 숲이 우거진 진초록 공원이 있고,
오른쪽 창엔 거름냄새가 스멀스멀 들어오는 텃밭이 있는 이곳 도서관에서
앞으로 일 년 동안 키가 좀 크고 치마 입기를 좋아하는 감성이 풍부해도 너~무 풍부해서
들꽃 한 송이를 봐도 눈물이 나오는 어떤 여자가 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