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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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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미소 부처님, 보원사터를 지나며


BY 金木犀 2012-07-09

여섯시 반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통인시장 앞에서 일행과 만나 먹을 것을 싣고 조계사 앞에 도착하니 갑작스런 취소가 폭주해 떠날 인원은 서른 명 남짓..썰렁하다 싶어 울상을 지으니 중론이 그게 더 단촐해서 좋을 수 있단다.

 

7시 넘어 버스는 출발해 서산을 향해 달려간다.갈길은 내포리 마애삼존불 일컫어 미소 부처님을 뵙는 게 우선이요 옆 동네 보원사터를 돌아본 후 절 뒤켠 아라메길을 넘어 개심사로 내려가 컨디션 따라 정해질 듯 했다.

 

충남은 가뭄이 유달리 심한 6월이란다.서울은 오후 늦게 거친 소나기가 지나갈 거라지만 오늘 새벽도 이슬비가 고작인 이곳은 눈에 띄게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며 마른 계곡들이 맘 아프게 한다.

 

10시나 될랑가? 내포리 숲속 주차장에 도착해 햇살이 기분좋게 퍼지는 계곡을 따라 오르니 바위를 등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세 부처님들이 이내 우리를 맞으시는데 온화한 모습을 뵙자  문득 발견 당시의 장난기 서린 일화가 떠올라 더 웃음짓게 한다.

 

1959년 4월 부여박물관장 홍사준 선생께서 여기 가야산 일대에 99개의 암자가 있었으나 한 스님이 100개를 채운답시고 백암사(百暗寺)를 지었더니 나머지 암자들이 홀랑 다 타버렸다는 전설을 상기하고 혹시나 절터나 탑 부처님등이 남아있나 탐문을 하던 중 동네 노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얘길 들었다고 한다

 

부처님은 못 보고 바위에 새겨진 산신령은 봤다. 산신령 양쪽에 여자 둘이 있다. 하난 큰 마누라고 하난 작은 마누라 같은데 작은 마누라가 손가락을 볼에 대고 용용 죽겠지 하니 큰 마누라가  던질려는지 손에 짱돌을 꽉 쥐고 있더라

 

노인이 말한 곳을 찾아가니 산신령과 마누라들이 아닌 부처님 세분이 계셨다. 산신령은 바로 현세불인 석가여래요 그 오른 쪽 본마누라는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로 짱돌이 아닌 여의주를 쥐고 있고 왼쪽 작은 마누라는 미래불인 미륵불로 턱을 괴고 있었다.

 

전설은 현실이 되는 순간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단숨에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서산 내포리 마애삼존불, 한때는 나뭇군들의 술내기 짱돌의 과녁이 돼 여기 저기 터지기도 하고 돌부처 가루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뼈와 살이 깍이는 고통을 당하기도 했으나 용케도 버틴 세월 끝에 바장거리지 않는 백제인을 말해주는 으뜸 이력서로 남았으니....

 

충남의 산은 높지는 않되 그윽한 품이다. 그 요란스럽지 않음이 바로 마애삼존불의 미소로 떠오른 건 아닐런지!!  예술 뿐이랴! 사람조차도 산천경계를 타고난다 했으니 충남사람들의 여유로움은 그 땅의 생김새와 무관치 않으리라 낙엽이 지면 산그늘이 없어 햇살의 각도에 따라 너그러운 풍모가 더 오묘하게 드러난다는 미소부처님,합장해 작별인사를 드리고 재회를 꿈꾸며 떠난다 

 

한창 발굴작업중이라는 가까운 보원사로 향한다.  삼만평이 넘는다는 보원사(普願寺)터는 당간지주와 석조(石槽) 부도 5층 석탑만으로도 충분히 그 웅장함을 짐작케 한다.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공덕을 기리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다는 당간지주 두 기둥 사이로 정확하게 금당 앞 5층 석탑의 모습이 들어와 앉는 게 신기하다.  탑은 백제 이래 고려를 거치면서 그 양식들이 섥여져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이나 기단에 새겨진 문양들이 희미해 안타까웠다.

 

기도는 자기 기도가 최고라고 한다. 일행들이 탑 앞에서 큰소리로 자기의 바램을 얘기하기에 나도 차례를 기다려 열망했던 속얘길 쏱아냈다.

 

내고향 강원도 영월에는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곳에 태화산이 있습니다 그 산 아래 지금은 사라지고 잔해물만 남은 세달사란 절이 있었습니다.세달사는 궁예가 환속하기 전의 절이기도 하고 이광수의 소설  꿈의 주인공 조신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보원사터에 큰 불사가 일어나듯 세달사도 큰절로 다시 태어나길 바랍니다.

 

용암을 뱉듯 숨가쁘게 그 말을 하고 나자 속이 텅 비워진 듯 후련했다 그리고 웬지 목이 메인다. 내가 부자라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 일을 시작하련만 형편이 그렇지 못하니 가피가 있길 바랄 뿐..가는 데 마다 이렇게 소원을 계속 말하면 여기저기서 거들 기운이 불같이 일어나 가자 영월 세달사로!!! 뭉쳐진다면 오죽 좋으랴!!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보원사 같은 큰 절이 고려 이후 갑자기 소실된 정확한 이유를 모르나 세월이 가도 절터는 남아 부활할 것을 꿈꾸고 사회가 국가자산인 문화적 가치를 존경하는 한 역사 속으로 성큼 다시 들어와 민족적인 긍지와 자부심으로 오래 두고 살아있을 것이다. 덧붙여 최근 보원사 터에서 나온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훔쳐간 더러운 놈들에게 한마디!! 갖다 노소!!! 앙!
 
점심 후 솔솔바람을 타고 보원사 뒷켠 아라메길을 넘어 열린 마음의 개심사(開心寺)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