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저희 엄마 일흔 일곱번째 생신이었어요. 비록 전 사십이 넘는 해동안 엄마에게서 미역국도 못 얻어먹어봤지만 원망은 하지 않습니다. 많이 서운해서 그렇죠. 제가 삐딱하게 살지 않고 이렇듯 바르게 가정을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멘토를 해주신 분이 바로 울엄마거든요. 세월이 벌써 강산을 일곱번이나 바꾸고도 일곱해를 맞이했네요. 솥뚜껑처럼 단단해져버린 울엄마 손을 볼때마다 저는 저 안쪽 가슴이 시리고 아려옵니다. 울엄마 살아오신 인생을 생각하면 생일 안치러줬어도 그것만으로도 커버가 된답니다. 전 마음이 급합니다. 연세가 이렇듯 되시다보니 그간 못했던 엄마와의 추억거리를 만드느라 제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비록 너무 협소하지만 하나하나 만들어보려합니다. 어린시절 울엄만 정말 일도 일도 그런 일이 없어요. 아버지께서 나무 기르는 것을 좋아하셔서 시작한 조경이 꽤 넓었답니다. 더러는 학교에 납품도 하고 나무를 사러 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거든요. 자식들보다 더 애지중지하셨어요. 그러다보니 엄만 저희 형제들을 뱃속에 담고서도 험한 일들을 하셨지요. 아버진 특별한 날 빼고는 집에 잘 안계셨어요. 선생님이셨거든요. 나머지 일은 엄마와 저희 형제들이 했죠. 참 저희가 칠남매거든요. 엄만 손에 흙독이 올라 늘 벌어지고 피가 나고 딱딱해진 소위 거북등과 같은 손이었어요. 제가 자랄땐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아버진 하루가 멀다하고 친구들이며 술상을 차리라고 하셨어요. 배가 잔뜩 불러있는 엄만 정말 너무 힘드셨을텐데 그 수발을 다 드셨습니다. 취하시면 엄마에게 욕과 손찌검도 하셨지요. 그때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서 저흰 방에서 꼼짝딸싹을 못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셨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엄만 저희들과의 끈을 놓지 않으셨어요. 중학교때 일거예요. 아버진 역시나 술이 만취된 상태에서 밤에 들어오시더니 상을 엎고 엄마를 때리셨어요. 또 저흰 가만히 소리죽여 울고 있었구요. 엄만 참다못해 \'차라리 나가 차에라도 치여 죽는다\'고 밖으로 뛰쳐나가셨어요. 전 겁이 덜컥 났어요. \'정말 울엄마가 그러면 어떻게 하지?\' 하구요. 얼른 엄마를 뒤따라나가 전 엄마의 바지가랑이를 단단히 부여잡았습니다. 엄만 놔라 하시면서 너무나도 서럽게 우시는 거예요. 그러시면서 \'내가 자식들 때문에 이런 천대를 받으면서도 살지 뭐가 좋다고 살어\' 하시면서 정말 너무도 서럽게 우셨어요. 저도 그런 엄마와 같이 한참을 울었습니다. 엄마가 너무나 고맙고 가여웠거든요. 그때 제 머릿속에 전 자식과 가족에 대한 생각이 뿌리내렸습니다.수십년을 자식들 생각에 딴 맘도 못가지시고 이렇듯 자리를 지켜주셨는데 제가 그깟 생일상에 무슨 큰 미련이 있겠어요. 이번 엄마 생신 땐 엄마께 글루코사민과 커다란 케잌을 드렸어요. 여지껏 중에 제가 드리는 젤 큰 선물입니다. 엄마와 사진도 찍고 저희 가족과 여동생네와 같이 맘껏 축하해 드렸어요. 엄마,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이렇듯 키워주셔서. 항상 건강하시고 형편이 더 된다면 다음 생신 땐 더 좋은 선물해 드릴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흉봤다고 벌떡 일어나시겠다. 그리고 엄마 진짜로 나 생일 첨이자 마지막으로 한번만 치러줘잉. 다신 말 안할께. 엄마, 많이 많이 사랑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