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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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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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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그 여름(유년시절)


BY 새봄 2012-03-09

막내이모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다. 일남 오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모는 나와 7살 차이가 난다.

난 언니가 없었고 막내이모는 동생이 없어서 우린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살았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었던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고,

남동생이 두 살터울이라 엄마는 나를 친정에 자주 맡겨 놓곤 하셨다.

내 고향도 막내이모와 같은 강원도 산골 그 집 그 안방이었고,

삼태기처럼 생긴 산골 풍경 속에는 막내이모랑 외갓집식구랑 내가 있었다.

산 가장자리로 계곡보다는 크고 강보다는 폭이 좁은 냇물이 흘렀다.

이모들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면 나는 옆에서 설렁설렁 빨래를 헹구었고,

여름밤에 이모들이 목욕을 하러 가면 난 팬티도 안 입고 퐁당퐁당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봄엔 사과나무 과수원을 따라 소쿠리를 들고 막내이모는 나물을 캐고

나물을 캐든지 말든지 나는 사과꽃향기에 봄이 좋았다.

그래서 그런가. 난 지금도 봄이 오면 사과 꽃 과수원이

벽에 걸어놓은 그림처럼 확실하게 보인다.

가을이 오면 벌래먹은 사과를 이모들이 얻어와

부엌에서 와그작와그작 캐물어 먹었다.

유년시절 대부분을 넷째이모랑 막내이모랑 두메산골 고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첫째이모와 둘째이모는 시집을 가서 외갓집엔 두 이모만 남아있었다.

약수터에 와 있는 지금은 넷째이모는 60살이고 막내이모는 57이고 나는 50살이다.

유년시절처럼 셋이 뭉쳐 강원도에 와 있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하루 중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넌 손님만 오면 밤에 잠을 안자고 울었어.

예쁘다가도 그땐 셋째언니는 왜 자꾸 친정에다 얘를 두고 가는 거야 했다니까.”

지금도 난 잠자리를 바꾸거나 조금 시끄러워도 잠을 못 잔다.

그래서 이곳에 오자마자 시계초침 소리가 거슬려서 건전지를 빼 놓았다.

난 엄마보다는 언니가 좋았어. 맨날 언니 옆에만 따라다녔잖아.

얘는 나만 따라다니고...지금처럼 우린 셋이 항상 같이 있었는데...”

아픈 것도 잠시 잊고 막내이모도 어린 시절 속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셋이 있으니 옛날생각이 많이 난다. 언제 이렇게 여유롭게 옛날 얘기를 하겠니? 그땐 고생도 엄청 했는데...동네 개구리가 씨가 말랐었잖아. 닭 키운다고 오빠가 날만 새면 개구리 잡아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일만 하라고 툭하면 때리고 오빠한테 누구도(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조차도) 덤비지 못했는데 나는 오빠가 욕하면 같이 욕하고 지게작대기를 던지면 나는 호미를 던졌잖아.”

으하하하 맞아 그랬다며 박수를 치며 웃었다.

아들 하나라고 외할머니는 아들만 위해서

외삼촌은 누나나 여동생은 일꾼이고 식모로만 여겼던 시절이었다.

 

이모들은 산을 하나 넘어 초등학교를 다녔고 나도 그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았고, 눈이 오면 눈을 받아먹었다.

목이 마르면 약수를 마시고, 산딸기를 따 먹고,

싱아를 까먹고 진달래와 아카시아 꽃을 훑어 먹었다.

꿀풀 꽃이 피면 꽃 똥구멍을 빨았고, 개미 똥구멍은 시큼했다.

오줌이 마려우면 길섶 풀밭에 오줌을 누웠고, 큰 것은 딱 한번 눴는데

그 다음날부터 남자애들이 찌끼 똥이라고 날 놀렸다.

이상하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귀신이 곡할 노룻이네. 

한동안 찌끼 똥이 어떤 똥일까? 하고 많이 생각했었다.

겨울엔 허리쯤에 눈은 항상 쌓여 있었고 눈이 많이 오던 날은 지붕만 겨우 보였다.

물밑이 훤하게 보이면 냇가에서 썰매를 타고

고드름을 따서 양지바른 곳을 찾아 해바라기를 하며 사탕 먹듯 빨아먹고 씹어 먹었다.

 

언젠가 막내이모가 보이질 않았다.

막내이모를 애타가 찾았더니 양녀 딸로 보냈다고 넷째이모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외할머니가 막내이모 사주를 보니 명이 짧다며

남의 집 양녀로 보내야 액땜을 할 수 있다고 했단다.

한동안 막내이모를 볼 수 없어서 난 슬펐고 시무룩했다.

난 엄마랑 같이 살다가 외갓집에 살다가,

기억은 막을 씌운 것같이 흐릿하고 까무룩 하지만

막을 통과하면 그곳엔 초록 산골이 보이고 다정했던 이모들이 보였다.

여름이면 서걱거리던 옥수수 밭, 손바닥만 한 메밀밭,

비탈 밭에 자주 꽃피던 자주감자, 수건을 둘러쓰고 비탈 밭에서 날 보며 웃던 외할머니,

그리고 그리고 잎이 내 키만큼 크던 담배나무, 일년초였지만 내 눈엔 나무처럼 보였다.

여름이면 나무 꼭대기에 분홍색으로 꽃이 피던 담배.

담뱃잎에 담배벌레가 생기면 이모들은 손으로 담배벌레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 담뱃잎은 우물물에 아무 씻어도 남아있던 끈적임과

그보다 예쁜 추억은 분홍색 담배 꽃이었다.

담배일은 어떤 농사보다 힘들었고 고단하고 고달팠다고 이모들은 말했다.

담배농사보다 먼저 농촌에서 돈이 되는 일은 누에를 기르는 일이었다.

허리에 소쿠리를 차고 뒷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뽕잎을 땄었다.

이모들을 따라 가재가 많던 뒷산에 올라 뽕잎을 따서 소쿠리에 가득 차면

넓은 보자기에 싸고 모가지가 쑥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산을 내려왔던

오십년 세월 저쪽의 이야기가 며칠 전 일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누에에게 뽕잎을 주면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소나기 오는 소리 같았다.

누에는 순식간에 자랐다.

그 먹보들을 키우려면 매일매일 신선한 뽕잎을 따야만 했으니...

이모들에겐 고달픈 시절이었지만 나에겐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시절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어리기도 했지만

외갓집에 놀러온 도시 아이였기 때문에(난 산골아이였다고 생각한다.)

이모 옆에 붙어서 세월아 네월아 설겅설겅 놀며 일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꽃과 곤충들과 똥개들과 잘 놀기만 하면 되었다.

 

기억의 막이 또 한 번 거치면 빨래 함지박을 끼고 걷는 막내이모가 다시 보인다.

나는 졸랑졸랑 개처럼 따라가고 내 뒤로 개들이 줄래줄래 따라오는 게 보인다.

장독 뒤에 앵두꽃이 하얗게 피면 봄이 방금 온 것이고,

앵두가 익을 무렵에 막내이모는 소를 몰고 오다가

소 뒷발에 엄지발이 밟혀 발톱이 빠졌다. 막내이모 울던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아팠을까?

작았지만 예뻤던 막내이모 긴 생머리가 보이고,

날 데리고 어디든 갔던 날들이 투명한 막 사이로 선명하게 보인다.

내달리던 냇물 옆 운동장 같았던 잔디, 징검다리 건너 바람에 고개를 흔들던 패랭이 밭.

군불을 때며 찬 손을 녹여주던 막내이모 손길, 같이 구워먹던 옥수수, 팥 씹히던 감자떡,

나의 유년시절은 이모들과 함께 거닐었고, 벽에 있는 액자처럼 걸려있다.

 

그때는 믿지 않았다. 막내이모가 단명 한다는 것을.

남의 집 양녀로 보내졌다가 일 년 만에 돌아왔으니 액땜은 했다고... 설마?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