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오랜만이지요? 이제야 소식 전합니다.
내일 민박집 주인아줌마가 춘천으로 볼일을 보러간다기에
급하게 써서 편지를 보낼 수가 있었어요.
산속으로 들어오던 첫날밤에 한 일은 벽시계 건전지를 빼는 일이였어요.
썩썩거리는 시계 소리가 사람 마음을 불안하게 하더군요.
텔레비전도 틀지 않는답니다. 아니 틀었더니 나오지 않는 거예요.
여긴 남미페루에 있는 마추피추 같아요.
깊고 높은 산속에 있어서 그 나라에서도 몰랐다는 공중도시 마추피추.
어쩜 바다위에 떠있는 고립된 섬이기도해요.
텔레비전에 딸린 이상한 기계를 꽂아야 텔레비전이 나오고
채널도 아주 복잡한 수학기호 같아서
주인아줌마가 적어준 번호를 눌러야 나오더군요.
핸드폰도 민박집 주변으로 통화가 되는 곳이 있고 안 되는 곳이 많아요.
마을을 벗어나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갈 때면 아예 가지고 가질 않아요.
택배도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는군요.
구불구불 산 밑으로 내려가서 직접 받아와야한답니다.
이곳은 누구의 고향이 아니라 약수가 유명해 지면서
장사를 하기 위해 들어온 타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민박집이 몇 집 있지만 우리만 민박중이고 주말이나 돼야
차를 대 놓고 약수를 받아가고 그것마저도 뜸해 마을 별명이 휑한 마을이 되었답니다.
여자들 셋은 잠시 세상일들을 꺼 놓고 있습니다.
시계도 멈추고 사건사고도 볼 수 없고, 사람들과도 연결되지 못하지만.
도시에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피곤하고 두려웠지만
휑한 마을엔 그런 형식적이고 너덜거리는 피곤과 두려움은 없어요.
화장도 안하고 염색도 안하고 고무줄 바지 입고... 참 편해요.
돈 쓸 일도 없고, 일도 나가지 않고, 때 걱정도 없어요.
이렇게 평생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지 그건 모르겠지만
이렇게 산다고 해서 두렵거나 외롭진 않을 거예요.
도시에서 사람들과 마주보면서도 쓸쓸하고 외로웠으니까요.
어젠 산모퉁이를 돌다가 입을 활짝 벌린 나리꽃 세 송이와
입을 막 벌리고 있는 나리꽃 두 송이를 발견했어요.
우와! 나리꽃이다, 했는데 막내이모는 나리꽃을 쳐다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꽃을 보면 나처럼 수다스럽던 이모였는데... 그게 참을 수 없이 슬퍼져요.
온통 초록으로 쌓여있는 곳인데도 이모 눈에는 검정색으로 보이나 봐요.
사람은 일만 육천 가지의 색깔을 구분할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막내이모는 이제 색을 구분하지 못하고 검정색으로만 보일 거예요.
이모와 같이 있는 우리도 다양한 초록치마를 입은 산이
검정색 상복으로 보일 때가 더러더러 있어요.
검정천막이 서서히 망막을 막아가고 있는 장님처럼...그게 참 무서워요.
님은 어떠세요? 가끔 서로의 이기심으로 다툴 일이 많았던 날들을 떠올려요.
말로 상처주고 다시는 안 볼 타인처럼 집으로 돌아오던 날들이 보여 부끄러워요.
산으로 걸어 다니면서 각자의 시간 속에 침묵할 때가 많아요.
그러면 생각이 많아지지요.
만남이 무엇인지, 왜 그때는 못 참고 그랬는지 하다못해 헤어질 꼬투리도 많았는데
헤어지지 못 했던 내가 어리석어 혼자 쓴 웃음을 짓지요.
이기적인 한 사람과 떠도는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와
차창으로 보이는 강물을 내다보며
물 흘러가듯 살자던 밑도 끝도 없는 인연을
먼 훗날 같이 하자던 책임도 없는 약속을 여기서도 하고 있어요.
시간이 흐르면 좋아질 거야, 기적처럼 낫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뿐하게 나아서 사람 살던 곳으로 내려가면 계수나무도 심고
배추겉절이랑 삼겹살이랑 으적으적 씹어 먹자고.
우린 막내이모에게 희망의 노래를 자주자주 불러줘요.
막내이몬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도 없이 쓸쓸한 미소뿐이지만.
전 유년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엄마의 강요였지만 일요일이면 무조건 교회에 가야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비구니 스님이 쓴 자서전을 읽고
불교적인 가르침과 화두가 저를 방황하게 했어요.
우린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막연한 의문이 생기게 되었지요.
주일이면 교회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왜 태어났을까? 내가 왜 사는 거지?
죽으면 난 어디로 갈까?
그러다 법정 스님 책을 접하게 되고 완전 빠져서 법정스님 책은 다 찾아 읽게 되었죠.
스님이 칩거하셨던 불일암까지 찾아가기도 했지요.
(제가 갔을 땐 스님은 강원도로 떠났을 때임)
막내이모가 제게 물어요.
난 왜 태어났을까? 난 어디로 가는 거니?
제가 수없이 물어보고 혼자 답하고 결국은 무엇인지 모르고 흘러온 삶을
요즘 막내이모가 제게 묻고 있네요.
님이 계신 그곳에선 알 수 있나요?
왜 태어나 이렇게 병들었고 이젠 어떻게 어디로 가는 건지 그곳에선 알 수 있나요?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봐 주실래요?
그걸 안다면 답장 주세요.
여기까지 편지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답을 모르니 답장을 하지 않겠지만...
평상 앞 대추나무 잎이 참기름을 바른 듯 반질반질 거려요.
평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거든요.
대추나무는 제일 늦게 잎이 나온다고 들었어요.
늦게 잎이 나와도 꽃은 피고 열매도 많이 달리고 빨리 익는 편인데...
늦장부리는 대추나무도 제 몫을 다 하려고 이렇게 싱그럽게 살아있는데
왜 사람은 그 끝을 알 수 없을까요?
왜요? 하나님. 왜요? 부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