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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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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그 여름.(1)


BY 새봄 2012-01-11

어둑어둑해질 무렵 우린 그 산길로 접어들었다.

갈지자로 놓인 산길은 동해 쪽으로 넘어가는 미시령이나 한계령이 떠올려졌다.

이 어지러운 고갯길을 넘으면 파도가 넘실대는 동해안이 펼쳐질 것 같다.

이모들과 한적한 민박집을 예약해 놓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고 있다면 멀미가 울컥 거려도

빙글빙글 눈앞이 돌아도 신나고 즐거울 게 아닌가. 그러나 우린 그런 한가로운 여행길이 아니다.

이 길 끝엔 더 이상 굽이쳐 갈 수 없는 막힌 길일지도 모른다.

왜 그런 곳을 가느냐고 수없이 물어봤자 우리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길은 없으니까. 이게 최선이니까.

 

6월초 넷째이모에게 연락이 왔다. 그날은 병원 앞 길쭉한 나무 판 화단에 술패랭이꽃이 피던 날이었다.

 이 꽃은 꽃 가장자리가 면도칼로 살살 칼집을 낸 것 같다.

꽃잎 끝이 술을 매단 것 같아서 아마도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싶다.

막내이모가 많이 아프단다. 밤새 기침을 하고 입안이 헐어 음식을 씹어 먹을 수가 없다고 한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병원에 가봤자 입원해서 다시 그 무서운 검사만 하다가 불치병이라고 할 게 뻔 한데

병원엔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 말이 맞는 말이긴 하다.

막내이모는 2년 전에 흉선종이라는 희귀하면서도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이 병은 암 짓을 할 수도 있고, 암 짓을 안 할 수도 있는 희한하면서도 기분 나쁜 병이었다.

암 짓을 하면 2년 정도 살게 되고, 암 짓을 안 하면 팔 십까지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절망도 아닌 애매한 병.

그 뒤 막내이모는 시골로 자리를 옮기고 앞마당에 꽃이란 꽃은 전부다 심기 시작했다.

봄이 되면 꽃 심으러 올 수 없니? 꽃 보러 와라?

꽃이 피니 네가 생각난다며 막내이모는 전화를 하곤 했었다.

그러면 나는 속옷을 챙겨가지고 막내이모네 시골집으로 버스를 네 번이나 갈아타며 달려갔었다.

나중에 얘들 다 키우면 요 산 밑에 조립식 집이라도 져. 땅 그냥 줄 게.

 나도 외롭고 너도 외롭고 서로 의지하며 온 동네를 꽃동네로 만들어보자. 난 이길 수 있어.

암 짓을 안 할 수도 있다잖아. 우리 꽃에 묻혀 살자.”

 

일단 일하던 병원에 며칠휴가를 내서 막내이모네로 갔다.

차창엔 나무가 여름을 맞아 선명한 초록색을 띄고, 길가 화단엔 붉은 양귀비꽃이 드문드문 피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논두렁길이 햇볕에 말라 건조했다. 숨을 깊게 쉬어도 가슴이 답답하다.

넷째이모는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고 했다.

막내이모를 어떻게 봐야하나 눈물이 나온다. 논두렁길이 울렁거린다.

이모네 뜰에 들어서니 개가 먼저 달려 나오며 꼬리를 친다. 그래 네가 뭘 알겠니.

뜰엔 코스모스가 일 미터쯤 자라있다.

막내이모가 제일 좋아하는 코스모스는 뜰에 그득그득 넘쳐나고 있었다.

돌담을 쌓은 화단위엔 길가에서 본 양귀비꽃이 슬쩍 보인다.

막내이모를 보자 눈동자는 물이 되어 흐른다.

뒤이어 외삼촌내외가 도착하고 엄마와 둘째이모가 왔다. 다들 말이 없다. 서로들 울기만 한다.

산속으로 가자.

그 곳은 약수도 있고 맑은 공기도 있고, 병원에서 못 고친다는데 마지막으로 자연에 맡겨보자.

거쳐할 곳은 내가 알아볼 테니 마지막으로 매달려보자고 외삼촌께서 말씀하셨다.

외삼촌이 살고 계시는 춘천 쪽에 약수터가 있고,

그 약수를 마시고 병을 고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다고 내 병이 날까...? 아무도 안보는 곳에 가서 죽고 싶긴 해...”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군가 막내이모 병간호를 해야 한다. 넷째이모는 당연히 간다고 했고, 나도 가기로 했다.

직장보다는 막내이모가 우선이었다.

넷째이모는 혼자가긴 무섭고 겁났는데 나도 같이 가준다니 내 손을 꼭 잡으며

세상 것 잠시 접고 막내이모를 살려보자고 했다.

막내이모네 화단엔 여름 꽃들이 마악 신나게 터지고 있었다. 그래 꽃 너희가 뭘 알겠니.

 

병원에 사직서를 냈다. 병원에선 좀 쉬었다고 다시 나오라고 했다. 막내이모 얘기는 하지 않았다,

시골로 내려가 살 거라고 했다. 핑계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딸이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경제적으론 그래도 풀린 편이고, 고등학생인 아들이 걸렸다.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란다.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한 얘들이라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유월 20일경 약수터 밑에 민박집을 얻었다고 한다.

막내이모는 여전히 기침이 심하고, 음식을 씹을 수가 없어서 뭐든 믹서에 갈아 먹어야했다.

맵고 짠 음식도 입안이 아파 먹을 수가 없었다.

살림살이를 챙겨 막내이모 시골집을 나서던 날엔 양귀비꽃이 화단에 붉게붉게붉게 피고 있었다.

코스모스 꽃이 필 때 여길 올 수 있을까...?

코스모스에겐 가을이 오겠지만 나에게도 가을이 올까?

막내이모는 화단을 보며 자꾸자꾸 울었다.

 

산속 약수터에 도착하니 어둠이 깊었다. 차에서 내리니 물소리가 가깝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가 마중을 나와 막내이모 손을 꼭 잡아주며 잘 오셨어요, 한다.

외삼촌이 민박집을 얻을 때 막내이모 얘기를 했다고 한다. 얘기를 안 해도 금방 알 테지만.

물 건너 민박집 창이 귤빛으로 환하다. 집 마당으로 들어설수록 물소리가 더 가깝다.

 기역자 민박집엔 우리가 머물 방이 제일 넓단다. 기역의 부분이 우리 방이다.

화장실이 붙은 긴 방. 원 룸. 이불장 하나, 옷 장 하나, 중간 벽에 붙은 소형 부엌, 창 두 개,

창 하나를 등지고 앉은 텔레비전, 텔레비전과 딸린 이상한 기계, 전기밥솥,

우린 그 곳에 대충 살림살이를 놓았다.

압력 밥솥, 뭐든 갉아야하는 믹서, 각자 가지고 온 옷 가방들, 양념거리들,

그리고 막내이모 약봉지 한 가방.

체리는 방안 구석구석 냄새를 맡는다. 체리는 막내이모가 데리고 온 개다.

체리를 꼭 데리고 이곳을 오겠다고 해서 민박집에 미리 얘기를 하고 허락을 받았다.

이모 둘, , 개 한 마리는 겹겹이 산으로 막힌 이곳에 여행 가방을 내려놓았다. 즐겁지 못한 여름휴가.

귤빛 전등을 끄고 우린 누웠다. 조용하다. 물소리만 조용함을 밀어낸다.

막내이모의 거친 기침소리만이 물소리를 잠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