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되었다.
월동준비로 비닐창을 치고 김장을 했다.
혼자서도 잘 해요..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국 몸살을 앓고 말았다.
\"무우채 잘 쳐주던 남자가 그리웠지?\"
친구의 전화에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립더라.\"
그랬다. 그날은 그리웠다.
야채 잘 다듬어주고 무우채 잘 쳐주고 뒷설겆이 잘 해주던 남자가 있었다.
올해만 그리워하고 내년에는 잊어야지.
그리워한것은 상황이지 사람이 아님을 변명해본다.
며칠을 침대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땀을 흘리며 잠만 잤다.
죽 한그릇 끓여줄 사람이 없고 물 한컵 떠다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감기나 배탈같은 잔병치레는 하지 않는다고 큰소리 치던 시절이 있었다.
\"난 대형사고만 치거든. 잔병은 상대 안해.\"
그런 말을 곧잘 했다.
이제 나이는 어쩔수 없는가보다.
위염으로 고생을 하고 감기로 누울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소화기관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그것도 이젠 아닌가보다.
내시경으로 찍은 위사진은 빨간 골이 많이도 쳐 있었다.
\"위염이 아주 심해요. 암은 아니지만요.\"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나를 본다.
예전에는 그냥 넘어가던 말도 가슴 한가운데 턱 걸리면 내려가질 않는다.
늙으면 잘 삐진다는 말이 맞다.
남의 말 한마디에 예민해지고 있는 나를 본다.
어쩌면 지금의 내 상황때문인지도 모른다.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
초라하게 늙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 뒷편에 나를 쉽게 생각하고 말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 경계심이 자존심과 친구가 되어서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너그럽게 늙어가는 일은 불가능할듯 하다.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너그럽게 늙어가고 싶었거늘 그건 한갖 희망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이 모든것이 자격지심에서 비롯됨을 모르지는 않는다.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나갈 나인줄 알았더냐..
자존심이 또 발동을 한다.
튕길 나이가 아니라지만 나는 아직 튕기고 싶다.
누구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요즘은 그런 날이 너무 잦아 자꾸 나를 가두게 된다.
지금의 내 상황이 아무리 외롭고 궁색할지라도 사람에게 기대를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성깔이 대단하군.\"
그런 말을 들었지만 나는 나를 내어 놓고 싶지가 않다.
나를 내어놓는 순간 더욱 초라해질것만 같기때문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계산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픈것이 몸인지 마음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번 주에 어머니 생신이 있잖아요.\"
며늘애의 전화를 받고 달력을 본다.
달력이 아직 십일월을 넘기지 않고 있었다.
달력을 뜯어내며 마지막 남은 한장을 바라본다.
맞다.
이번주에 생일이 있군.
며칠후면 만 육십사세가 된다.
나는 올해에 무엇을 했는가.
마지막 남은 한달동안 또 무엇을 할것인지..
창밖을 본다.
겨울이 넘실거리고 있다.
밖을 나가본지가 언제였던가.
나를 가두고 있는 맛에 길들여지고 있으니 밖이 궁금하지가 않다.
김치가 넉넉하고 쌀이 넉넉하니 가난하지는 않다.
김치는 맛있게 익었다.
아직 솜씨가 죽지 않았군..
혼잣말을 하며 웃는다.
집을 보러오는 사람은 요즘은 뜸하다.
오천만원만 있으면 내가 이 집을 사버리면 좋으련만...
그냥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기리라 마음 먹는다.
망상을 접고 다시 책을 편다.
시나리오가 소설보다 어렵지는 않지만 아직 낯설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인생을 글로 그릴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