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엮었으니 여행 마무리까지는 써야 할 거 같다. 뒷이야기도 좀 남겨두고 싶다. 그래서 마저 써내려가기로 한다.
1시 넘어서 우리는 비빔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나물은 다양하게 넣었지만 고사리의 쓴맛과 도라지의 아린맛이 씹을 때마다 살짝 느껴졌다. 그래도 밥이 들어가니 뱃속이 든든하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내장산을 빠져나와 정읍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정표를 보면서 가는 수밖에 없다. 돌아가는 코스로 변산반도에 있는 채석강을 선택한 것은 아침에 급작스럽게 정해진 거라 코스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순전히 감으로 가야 한다. 군데군데 있는 이정표가 도움이 된다.
변산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린다.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서 움직이다보면 변산을 알려주는 이정표도 나타나겠지.
언니는 여전히 불안하다. 내가 후포항으로 나가는 좁은 마을길로 들어서자 더더욱 불안함을 드러낸다. 아마도 인천으로 올라가는 막차로 오가와 여사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한 모양이었다.
줄포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난 ‘것 봐! 줄포 가는 길이 나오잖아.’라고 하며 그녀를 안심시킨다.
줄포라는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을 해서 얼마를 달리자 내소사 이정표가 보인다. 내소사에 들르고 싶은 욕구가 인다. 내소사에 들를 거냐는 내 말에 채석강만 들를 거란다. 아쉽지만 지나칠 수밖에 없다.
곰소에 들어서자 젓갈상점들이 즐비하게 눈에 들어온다. 소금 나는 동네니 젓갈 만들기에는 딱이라는 생각을 한다.
좀 더 해안가를 따라 달리니 중간 목적지인 채석강이 나타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리는 바닷가로 나갔다. 물이 들어오는 시간대인 모양이다. 물이 해안을 따라 넘실거린다. 예전에 왔을 때 한가롭게 헤엄치던 숭어떼도 보이지 않는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바위들도 ⅓이 물에 잠겼다. 그래서 바다로 내려갈 수가 없다. 언니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방파제를 따라 걷다가 채석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오가와 여사가 잡아끄는 걸 이번엔 독사진도 한 장 찍어야죠 하고 밀어낸다. 그녀가 아쉽게 손을 놓고 가서 포즈를 취한다.
이제 달리는 일만 남았다. 군산으로 가기로 한다. 새만금방조제를 선택한다. 부안과 김제를 거치지 않으니 시간은 많이 절약될 거 같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위를 거침없이 달린다. 왼쪽에서는 바닷물이 연신 찰랑거린다. 방조제 안쪽은 아직 황량하다. 매립되지 않은 채 그대로다. 갯벌의 기능을 생각하면 잘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안쪽엔 10여년 전 친구와 선운사를로가던 중 내려서 굴을 땄던 곳이 있다. 왠지 추억 하나가 잘려나가는 기분이라 썩 좋지가 않다.
방조제길 오른 쪽에는 쉼터가 군데군데 있다. 여울 쉼터, 소라 쉼터, 바람 쉼터 등등.
언니는 방조제에 들어서면서 설명을 하느라 바쁘다. 방조제라는 단어도 가르친다.
인천행 버스를 타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다. 5시 10분에 막차가 출발한다는데 시간은 거의 다다라 있었다. 난 우리 집에서 하룻밤 더 묵고 가도 된다고 말한다. 헌데 가야만 한단다. 수업할 자료를 만들어야 한단다.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내가 아니다. 준비 없이 들어간 수업이 듣는 사람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얼마나 지루한지 알기에 나도 굳이 잡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수업준비다. 자기네 문화를 알리겠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강의하는 외국인 강사라면 이런 준비는 더더욱 철저하고 치밀하다. 문화원을 가 봐도 그게 눈에 다 보인다.
그래도 일단 군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가 봐서 부천행이 있으면 타기로 한다. 다행이 6시에 출발하는 부천행이 있단다. 가다 배고프면 먹으라고 쪄온 계란 세 개와 소금을 건네준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봉지에 여며 배낭에 넣더니 고맙다고 꾸벅 절한다. 난 당황하여 얼른 그녀를 의자에 주저앉힌다.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멋쩍어진다.
차에 올라타기 전 난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가 힘을 주어 내 손을 쥔다. 손이 따뜻하다. 그녀의 몸속에도 내 몸에 흐르는 따뜻한 피가 흐른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일본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피는 따뜻한데 왜 그 안에 스며있는 마음은 그렇게 잔인했을까? 잔인한 건 윗자리에 있는 소수였다고 그렇게 어물쩡 넘어갈 수 있을까?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명령하는 대로 따른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는 걸까? 아니다. 줏대 없이 남의 명령에 따라 저지르는 잘못도 잘못이다. 남의 생각에 슬쩍 기대서 행동하는 것도 잘못이다. 선이란 자기 잣대로 옮고 그름을 따져 행하는 데서 나와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행동도 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녀의 따뜻한 손이 내 생각의 벽을 허문다. 일본인이라고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야.
그녀의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조용한 시선이 오래 기억될 거 같다. 그녀가 한국인이라면 친구로 가까이 두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남 얘기를 질펀하게 늘어놓지 않을 거 같은 그녀의 조용조용함이, 60의 나이에 서슴없이 새로운 삶에 도전해서 살아내고 있는 그녀의 열정이 나를 움직인다. 일본인이라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어댔던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