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속에는 농사꾼의 딸이라는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대형마트보다 5일장을 좋아하는 것도, 싱싱한 야채만 보면 내 눈길이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도, 내 아파트 창틀에 상추를 기르는 것도, 시장이나 마트에서 농산물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재배했던 작물들과 비교하는 버릇도 모다 그 흔적이다.
이번 가을 들어 처음으로 난 아파트 창틀에서 상추를 길러 먹고 있다.
자라난 잎을 따서 식탁에 올린 적도 벌써 여러 번이다. 쑥쑥 자라 어우러지는 잎을
매일 들여다보면서 먹는 재미에 보는 재미까지 다가와 요즘 하루하루가 즐겁다.
엊그제는 아파트 창틀에서 자라는 상추를 보고 있다가 몇 년 전 저승으로 보내드린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 생각 속의 아버진 하루도 편안히 쉬어보지 못하셨다.
밭으로 논으로 비가 오는 날은 하우스 속에서, 양계장을 할 땐 양계장까지, 돼지를
키워 팔 땐 그 일까지가 모다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버진 새벽부터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고된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셨다. 고된 농사일을 하시면서 한 번쯤 딴 데다
한눈을 팔 법도 하신데 그런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게 아버지의 한결같은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진 우리에게 듬직한 산과 같으신 분이었다. 얼마 안 되는 작은
농토를 가지고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상황이셨다. 우리보다 잘 산다는
집들도 어느 정도의 교육만으로 만족할 때였다. 그때에 내 아버진 자식들을
가르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말을 입으로 뱉어
내시면서도 딸인 날 대학까지 뒷바라지 해주신 걸 보면 안으론 배움에 목말랐던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그러지 않았을까?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두 잃고, 4대 독자라는
부담감을 안고 징병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떠도셨다는데.
배움의 기회는 가져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배움에 대한 욕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셨던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틈틈이 혼자 한자를 익히신 걸 보면 배움에 대한
욕구도 그만큼 강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배우지 못한 한이 내면에 왜
없었겠는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식들을 가르치신 건 바로 그 한 때문이셨겠지.
아버진 그 한이 대물림 되는 게 무서우셨을 게다. 그래서 그 한을 당신이 모두
짊어지시길 원하신 거 같다. 그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말이다.
푸푸하고 힘겨운 숨소리를 내뱉으시면서도 고단한 몸을 푹 쉬어보지도 못하시고
다시 일어나 밭으로 가셔야 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 난 창틀에서 자라는
상추를 보며 그 당시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보려 한다.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셨을
게다.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거 같다. 그런데도 자식들 뒷바라지할 그놈의
돈 때문에 번번이 그 생각을 밀어내셨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남들은 덥다고 그늘을 찾아 쉴 때, 온 밭을 돌아다니며 당근을 고르게 기르기 위해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떠내 빈자리에 옮겨심기도 하고, 빼곡한 곳은 솎아내 일정한
간격을 만드시느라 여름 한복판에 따가운 햇살에 몸을 맡긴 채 몇 날 며칠을
당근밭에서 사셨던 아버지의 쪼그려 앉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파도 상품가치를 높이려면 흰 대부분이 길어야만 한다며 간간이 삽으로 흙을 퍼
대파를 덮어주셨던 아버지의 삽질하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아버진 그렇게 당신의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는 심정으로 당신의 또 다른 자식들에도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당신의 작품이 어줍잖은 것을 용납하지 못하셨다는 생각도
다가온다. 그래서 아버지의 작품은 항상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월등했다.
어디에 내놔도 최상품으로 인정받으셨다. 장사꾼들도 아버지가 길러낸 농작물엔
일체 토를 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근도 손바닥 정도의 크기가 아니라 지금
내 팔뚝 절반의 길이는 되었었다. 대파도 푸른 잎 부분보다 흰 대 부분이 갑절은 길었었다. 그런 아버지의 농작물을 보며 사람들은 한결같은 감탄을 자아냈다.
내가 보기에 그건 보통의 정성으론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였다.
아버진 모든 정성을 당신의 손길이 닿는 데마다 쏟아 부으셨다.
비록 가난하여 규모는 작았지만 아버진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방법도 사용하셨다.
지금 농가들에서 사용하는 방법들 중 많은 것들은 이미 아버지가 40여년 전에
사용하신 방법들이니 말이다.
집 뒤에 소규모 양계장을 할 때(나중에 양계장이 대형화되는 추세가 되면서 접어버리셨다.)였다. 비록 몇 백마리 정도로 규모는 작았지만 아버진 그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6월이면 아카시아 잎을 따다 말려 바순 후 사료에 섞어 먹이셨고,
아카시아 잎이 다 떨어지면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부스러기 멸치를 몇 포대씩 사다
섞어 먹이기도 하셨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생산해낸 달걀을 누가 더 가격을 높이
쳐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버진 그래야 노른자의 색깔이 더 붉어진다며 그 귀찮은
일(아카시아 잎을 따는 것은 우리 몫이었음)을 그만두시지 않으셨다.
나중에 양계장을 접고 그 자리에 돼지를 기를 때도 마찬가지셨다.
육질이 더 단단해진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셨다. 당신이 먹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당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일은 양계나 양돈에서만이 아니었다.
밭작물에도 같은 정성을 다 쏟으셨다. 집안에 있는 지하수에 손수 호수를 땅 밑으로
늘여 멀리 떨어진 밭까지 연결하셨다. 그리곤 그 뜨거운 여름 해를 견뎌가며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온 밭의 작물에 물을 주셨다.
그런 아버지의 노고가 빚어낸 결과물들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를 세워주었다. 때로 형편없는 가격 때문에 고개를 숙인 적은 있으셨을지라도
당신이 만들어낸 작물에 실망하신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내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난 명퇴를 하고 하루하루를
뒹굴뒹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식들의 뒷바라지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여전히
몸을 부리셨을 그 나이를 난 너무도 편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내게 이런 삶을 살도록 뒷바라지 해주신 내 아버지,
그리고 내 어머니가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지금 이런 삶으로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기릴 수 있게 해준 것도 감사하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름 앞에,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