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또 온다.
비 안 오는 날이 정상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다.
잔뜩 내려 앉은 하늘이며
눅눅한 공기
차양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
가뭄 끝에 단 비 소식이라야 반갑지
이건 반가운 비가 아니라 징글징글하다.
정신차리고 구석구석 안 돌아보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쥐새끼보다도 더 빠르게 곰팡이가 쓸어있다.
락스를 묻힌 걸레를 끼고 살다싶이했는데도
너르디 너른 주방 구석데기엔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악마의 꽃처럼 피어있다.
돌겠네~~~~~~
또 걸레를 들고 한바퀴 돌아 본 다음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 날의 흔적인 양
검게 탄 얼굴을 거실 거울에 비춰본다.
귀찮아서 싹뚝 잘라버린 머리는 더벅머리 섬머슴같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은
동남아에서 이주 해 온 불법거주자같다.
목 늘어난 면 티셔츠에 헐렁한 반바지
언제나처럼 내 전면을 감싼 앞치마 차림.
난 늘 보던 모습이라 오히려 편한데 남편은 아니라고 했다.
며칠 전 부산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남편이 뜬금없이 물었다.
\"당신은 행복해?\"
출장 갔던 일이 잘 끝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눕히고
목에는 차량용 베개를 목도리 도마뱀처럼 두른 자세로
발가락까지 까딱거리며 헐렁한 폼으로 갑자기 들은 질문이었다.
\"그으럼~~~행복하고말고.
일 때문이긴 해도 이렇게 가끔씩 드라이브도 하고
애들 공부 도중 하차 안 하고 잘 하고 있지~
당신 내 곁에 있지 안 행복할 이유가 뭐 있어?\"
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라는 생각으로 시원시원 대답을 했다.
그렇게 대답을 해 놓고도 룰루랄라~~`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정작 대답은 그렇게 해 버리고 나는 편한데
남편이 심각한 얼굴이질 않나~~
\"왜~~에~~???
난 행복한데 당신은 안 행복해?
건강한 마누라에 토끼같은 이미지는 이미 지났지만 이쁜 두 딸에
착한 아들 하나면 족하지 않나?
직장까지 든든하게 있는데 왜 그래?\"
나는 당연하단 생각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하고 있는데
남편으로부터 나온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난 안 행복해.
아니 덜 행복하다는 말이 맞겠다.
너무 여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스톱장치가 고장난 전차같다고나할지....
당신이 건강한 아내는 맞았는데 그건 과거형이었고
이젠 내가 너무 미안해진단 말이지.
너무 오랫동안 일 시키는 것 같아 무능한 남편같잖아.
결혼하고 지금까지 당신은 무슨 일이건 늘 했고
지금은 건강도 옛날같지 않은데....
그럴수만 있다면 당신은 일 그만하고
집에서 좋아하는 꽃이나 가꾸고 몸 돌보는
조금 한가한 생활이면 참 좋겠었어 그래.
우린 둘 다 몸도 마음도 너무 여유가 없이 살았던 것 같아.
미안하다.
당신을 너무 고생시키기만 해서....\'
난 안다.
남편이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결혼하고 지금까지 몇번의 큰 수술을 한 남편이 마음이 급한거다.
늘 자신의 건강을 잘 체크하는 남편이지만
뜻밖의 일들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최근에도 날 무지하게 놀라게 한 남편이다.
물론 본인이 더 놀랐겠지만.
응급실에 입원한 남편이 혼자 이 큰 집을 지키는
내가 걱정이 되서 밤 늦게 전화했을 때
괜찮느냐고..더 많이 아프진 않냐고 물어야했던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나 아직 홀로서기 할 자신이 없단 말이야~~!!
얼른 다 나아서 집으로 돌아 와.
이 집 너무너무 넓고 무섭단 말이야~
내 말 알아 들어???
빨리 집으로 돌아 오라구~~\"
내가 왜 그런 말도 안되는 전화를 했는지
아픈 사람한테 그런 말 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던가?
난 한심하고 또 한심한 아내였다.
내 고함소리를 듣고 놀란 고양이가 훌쩍 뛰던 모습에
볼을 타고 흐르던 내 눈물.............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거실에 등이란 등은 다 켜서 대낮같이 훤~하게 밝혔다.
혼자 오두마니 앉아서 어둠을 쨀듯이 마주했다.
이 어둠이 걷히면 날은 밝겠지만
남편의 몸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쓰러질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타고난 이 생명이란게
가는 방향도 모르고 길이도 모르기에 늘 우리는 약자같다.
내 몸을 나도 모르는 일이기에.
섬머슴같은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 여자가 낳은 세 아이를
가족이란 이름으로 온 몸으로 사랑한 남자.
갓 쉰을 맞은 남자가 가족을 위해 또 자기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운명 앞에서
전신마취의 그 몽롱한 의식 끄트머리에서도 날 사랑한단 말을 가장 먼저 했던 남자.
사슴처럼 선하게 뜬 커다란 두 눈동자
더 못해 줘서 미안하다 말하는 다정한 입술
언제라도 잡으면 따뜻한 두 손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며 난 행복한데
남편은 그런 행복한 아내를 더 편안하게 못 쉬게 해서 미안하단다.
자다가 나도 모르게 끙끙 앓은 밤이면
새벽에 일어나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해 주는 남편.
그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사랑으로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남편은 마음이 급한가보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마음이 더 급한가보다.
아이들 공부마치는 날까지 같이 거들마했는데
남편은 자꾸 미안하단다.
본인은 나보다 더 많이 아프면서...........
키 크고 힘 쎄고 건강하고 애들 순풍순풍 잘 낳고
수백명씩 밥도 설렁설렁 잘 하는 내가 제일 사랑스럽다던 남편인데
그런 내가 이제는 안스럽단다.
강호동처럼 천하장사였던 아내가
소리소문없는 세월이라는 장사에 무너지는 모습을
남편은 아프게 바라본다.
아직은 나 건재하다구 왜 그래~~~~
난 행복해.
지금 당장 그만두더라도 비 피할 내 집있겠다~
아직은 씩씩한 남편있겠다~
딸 둘 아들 하나 만점짜리 자식있겠다~
나만 바라보는 화초들 있겠다~
돈???
그게 문제긴 한데 좀 적으면 어때?
빚???
그것도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이 더 많대잖아~~
세월이 가면 다 해결 날 일이고....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피값으로
백화점이다 명품이다 쇼핑에 재미 난 여자가 아니어도 좋아.
남편이라는 작자가 빈둥빈둥 놀면서 마누라가 애새끼 업고
노점상단속에 걸리면 좌판 엎어가며 번 돈으로
노름하고 기집질 하며 날리는 서방도 남편이라고 호적에 올리고 사는 여자도 있다는데 뭐.
우리 그냥 이대로 사랑하며 살자~~
애들 얼굴에 그늘 만들어주지 말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추억하며 늘 그 때처럼.
그 날의 그 운명적인 설레임을 상기하며
하늘이 이 땅에서는 우릴 다시는 못 만나게 하는 형벌을 주더라도
천국에서 다시 만나지 뭐.
난 그러고 싶은데 당신은 아니라고라?
더 날씬하고 나긋나긋한 여자 만나서 살아보고 싶다고~~
미안하지만 그 천국에는 그런 재미는 없다네요~~ㅎㅎ
글은 웃는데 가슴에는 피빛의 소리없는 눈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