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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 인생(9)] 회복된 작은 행복 그러나...


BY KC 2010-12-21

형은 제대 후 원직이었던 시청의 토목계로 복직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겐 공무원으로의 복직이 대단찮은 일로 보였을지도 몰라도 극심한 곤궁에 허덕이던 우리에겐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대단한 계기였다. 이전처럼 납입금을 못낸다고 수업 중간에 집으로 쫓겨오는 일이 없어졌다. 이전처럼 고구마 몇 개와 된장국 한 종지로 때우던 저녁도 없어졌다. 이전처럼 바느질거리가 없는 날엔 벽돌을 이러 공사판으로 다니시는 어머니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형의 복직이 우리에게 엄청난 풍족을 안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생계의 문턱에서 허덕이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이겠지만 몇 년 동안 집안에 드리웠던 암울한 안개가 걷히게 하는 마력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공무원 봉급은 매우 적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큰 의미의 큰 금액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생계 원천이 다시 정기적으로 확보되었다는 의미에 더해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형의 밝은 모습에 기인한 것이었다. 보통은 하는 일과 받는 급여로 인격이나 역할을 규정하는 것이 남자들의 본능과 같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일에 만족을 못하거나 적은 금액의 봉급을 받는 경우 대개의 남자들은 침울해지게 된다. 만족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을 회한에 침잠시킨다. 그러니 즐겁지 않고, 즐겁지 않으니 현실에서 벗어난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그 즐거움을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니 그 당시에도 살아갔던 남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형이 받았던 쥐꼬리만한 봉급은 그런 남자의 전형을 감안할 때 당연히 형에게 침울한 일상을 안겨야만 했다. 하지만 형은 그렇지 않았다. 형만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가난한 가족의 존재와 더불어 자신이 갖고 있던 밝고 긍정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적은 봉급에도 불구하고 궁핍한 우리에게는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소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는 현실이 형이 가진 본유적인 긍정적인 생각과 용해되어 보람으로, 그리고 그 보람은 밝은 기운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매우 적은 쥐꼬리만한 봉급이었지만 그것이 우리 가족에게 전해질 때 그 힘은 자못 대단한 금액으로 인식되고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은 금액에도 우리는 행복해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장보기 전매 특허인 썩은 사과, 벌레 먹은 복숭아, 절반은 도려내야 하는 자두 몇 개에도 우리는 과거처럼 우울해 하지 않았다. 여름철 저녁밥을 먹고 어쩌다 입에 물려주는 아이스케끼 몇 개에도 우리는 낄낄댈 수가 있었다. 돌아누울 공간도 없이 작은, 옆집에서 빌린 색바랜 텐트 속에서 모기와 한바탕 전투를 벌여가면서도 함께 즐거워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도 모른 채 하나밖에 없던 그 길었던 방 천정에 습자지와 같은 얇은 하얀 종이를 오려 만든 장식줄을 걸고 그 위에 몇 오라기 안되는 금빛, 은빛 빤짝이 줄을 걸쳐 놓을 때도 우리는 그 추운 겨울의 추운 방이 안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장식 아래에서 먹던 몇 개의 호빵에도 무한한 행복을 느끼곤 하였다.

 

외부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찮을 수 있는, 그러나 우리 가족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자족적이며 이해한계적인 이러한 행복감이 왜재적인 인정으로 더 크게 느껴졌던 계기가 얼마 있지 않아 찾아왔다. 그것은 형이 우수 공무원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이었다. 어떤 등급의 훈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노란색 종이에 대한민국과 대통령의 이름이 선명히 찍힌 상장과 함께 훈장을 받아왔다. 훈장은 가볍지 않은 무게의 금빛 색깔 금속이 황금빛 다소 거친 직물에 매달려 내부가 비로도로 만들어진 상자 속에 같은 황금빛의 작은 직사각형 모양과 함께 살포시 누워 있었다. 이 같은 공무원의 훈장 수상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던지 당시 지방신문에 박스 기사로 실릴 정도였다. 박스 기사에는 형이 육순의 노모를 모시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앞집에 살던 형 또래의 누나가 와서 큰 엄마, 나는 여태껏 큰엄마가 손이 여섯개인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던 해프닝은 지금도 가끔씩 우리 가족이 과거를 얘기할 때면 단골처럼 등장하는 행복한 웃음거리이다. 아무튼 그 훈장은 가족동반 산업시찰이라는 부상이 주어졌고, 다른 대부분의 참가자와는 달리 미혼이었던 형은 그 육순의 노모와 함께 산업시찰을 함께 하였다.

 

이렇듯 군 제대 후 형은 더욱더 우리 가족 모두가 전적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였고, 따라서 명실공히 우리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어머니가 가진 형에 대한 기대는 실로 엄청나게 컸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에서 자신들의 자식이 가장 똑똑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어머니들 이상의 확고한 확신과 그에 따른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부터 궁핍한 온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런데 그런 형이 온 가족의, 특히 어머니의 기대를 한 순간에 깡그리 무너뜨린 것은 형의 가까운 친구로부터 듣게 된 믿지 못할 소식으로였다. 그것은 형이 현장 근처의 술집에서 시중을 들던 아가씨와 동거에 들어갔다는 실로 엄청난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