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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의 성(性)의 차이를 인식하자


BY 그레이스 2010-12-1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의 저서 ‘대화편’의 하나인 <향연(Symposium)>에는 여러 사람들의 모여 사랑의 신 에로스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서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가 사랑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인간의 성()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부분이다.

 

신화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인간은 지금처럼 남자와 여자가 각각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세 가지 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남자와 남자가 붙어 하나가 된 남성, 여자와 여자가 붙은 여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붙어있는 양성이 각각 그것이었다. 태어나면서 자기의 짝이 정해져서 남성, 여성, 양성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붙어 있는 형상이었으니만큼 지금보다 덩치도 훨씬 컸고, 신체기관도 지금보다 두 배였다. 네 개의 손과 네 개의 발, 한 개의 머리에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었고 성기도 두 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덩치도 크고 능력도 뛰어나서 그런 자신들만을 믿고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면서 신들의 영역을 넘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늘을 오르는 길을 뚫으려다 신들의 노여움을 자초하게 된다. 분노한 신 중의 신 제우스는 인간의 힘을 약화시키고 벌을 주기 위해 인간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갈라놓은 사람의 머리를 뒤로 돌려 둘이 붙어져 있다가 떨어진 자국을 서로 보게 함으로써 벌을 받았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반으로 갈라놓은 그 부분을 그대로 두면 속이 보이기 때문에 살가죽을 잡아당겨 하나로 묶었다. 그것이 바로 배꼽이 되었다. 따라서 배꼽은 신들에 대항하다 벌을 받았다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우스는 인간을 멸종시키지는 않았다. 신들을 경배할 인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몸에서 둘로 쪼개져 두 사람이 되었으니 벌도 내리고 신들을 경배할 사람의 숫자도 두 배로 늘리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진 인간이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이 바로 사랑의 기원이다. 본래 남자와 남자가 붙어 있던 인간과 여자와 여자끼리 붙어있던 인간은 동성애자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에 붙어 있던 인간은 이성애자가 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전한 신화에 따르면 자신의 반쪽을 찾아다니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자 사랑이다. 그리고 그 반쪽을 찾는 데에는 성()이 기본이 된다.

 

()의 한자는 생()과 마음()을 뜻하는 (심방변)이 조합된 문자이다. 이는 나무나 풀처럼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모양에 마음이 합쳐진 것으로 몸과 마음의 종합을 뜻한다. 성에 대한 영어표현은 Sex, Gender, Sexuality로 나뉜다. Sex는 라틴어 Sexus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Seco(자르다, 나누다) Cut의 의미를 갖는다. 보통 Sex라고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나뉜(Cut) 성별로서의 남자와 여자를 의미한다. 반면 Gender는 태어난 이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남녀의 정체성을 뜻하는 것으로 문화적·후천적·학습된 성을 지칭한다. 그리고 Sexuality는 전인적인 성으로 Sex(생물학적 성) Gender(사회문화적 성)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는 동물적인 성 행동뿐만 아니라 성정체성, 성에 대한 태도, 가치관, 문화 인격적인 차원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통 남녀간의 성적인 문제를 얘기할 때는 이 Sexuality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동물과 달리 사람의 성은 복잡미묘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발정기의 차이이다. 동물은 특정기간 동안 발정기가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발정기가 없다. 아니 발정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특정기간 동안에만 짝짓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두번째 차이는 동물과 달리 인간의 성행위는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행해진다. 개처럼 길거리에서 행하지 않는다. 세번째 차이는 종족번식을 위한 동물의 성과 달리 인간의 성은 가장 높은 수준의 희열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의 성은 단지 동물과의 차이 뿐만 아니라 남녀간에도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와 같이 남녀의 한 몸이 신에 의해 분리되었다면 분리되기 전의 남녀는 성에 있어 동일한 생각과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야 한 몸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을테니까. 그러나 그 분리된 역사가 너무나 오래된 탓인지 아니면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많이 달랐던 탓인지 남자와 여자의 성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남자의 성은 자신의 ‘씨’를 되도록이면 많이 뿌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남자를 씨라고 하면 여자는 그 씨를 받는 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자는 본능적으로 되도록이면 많은 밭을 찾게 된다. 하지만 여자는 생산에 한계가 있다. 무한정 많은 씨를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씨 중에서 가장 좋은 씨를 받아 잘 키우는 것이 여자의 본능이다.

 

과거의 일부다처제(Polygamy)는 이러한 남녀의 본능에 따른 조합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성은 생물학적인 Sex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속에 마음()이 작용한다. Sexuality. 따라서 일부다처제에서는 사람들간 마음의 작용으로 인해 질투가 발생되었다. 자신의 씨만을 흩뿌려야 한다는 본능과 자신만이 좋은 씨앗을 받아야 한다는 본능이 질투로 발전했다. 질투는 자존감에 대한 위협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최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함과 위협이 질투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내 씨를 받아줄 밭이, 그리고 내가 받아야 할 튼실한 씨가 다른 사람에게 간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조바심과 좌절이었다. 그래서 일부다처제는 해체되고 그러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일부일처제(Monogamy)가 대안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본능은 살아 있어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보통 바람이라고 부르는 외도는 남자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남자가 자신의 씨를 더 많이 뿌리겠다는 억제된 본능의 발산이었다. 그래서 일부일처제라는 제도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노려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여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남자의 본능은 가부장사회에서 어느 정도 암묵적으로 용인이 되었다. 여자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여자의 질투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기 때문에 피가 마르고, 잠을 못자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도 대항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성해방은 성에 있어서도 여자의 억제된 감정을 속박에서 풀어주었다. 남자의 외도에 당당하게 맞서게 된 것은 물론 자신의 남자보다 더 멋진 씨를 가진 남자에게 사랑을 품게 된 것이다.

 

외도라 해도 남자의 그것과 여자의 그것은 차이가 있다. ()이 갖는 본질에 기인한 차이이다. 성은 앞서 보았듯이 생물학적인 Sex와 사회문화적 Gender가 합쳐진 개념이다. 사람의 성기가 Sex를 상징한다면 마음은 Gender를 표현한다. 우리말에서 마음을 뜻하는 다른 단어는 가슴이다. 가슴은 신체의 일부분을 일컫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마음으로 대체되어 쓰인다. 이렇게 볼 때 남녀의 신체구조 만큼이나 외도에도 차이가 있다. 남자의 몸에서 가장 앞으로 돌출되어 있는 것은 남자의 성기이다. 반대로 여자는 가슴이 가장 돌출되어 있다. ()에서 이 남녀신체구조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자는 여자를 볼 때 성기가 먼저 앞서가고 가슴은 뒤에 나간다. 반면 여자는 가슴이 먼저 나가고 성기는 그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만큼 조심스럽게 한참 뒤에 나간다. 남자의 외도는 가슴이 전제되지 않는다. 그저 본능에 의한 성기의 휘둘림이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가슴이 열려야 성기가 열린다. 그래서 여자의 외도는 남자의 그것보다 더 무섭다. 남자의 바람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잠잠해질 수 있다. 그것은 성기가 만들어낸 한동안의 광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바람은 조용하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는 바람을 펴도 가정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는 결코 돌아오는 일이 없다. 이미 마음()이 다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를 알 수 없는 여자는 남자가 외도를 하게 되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간 것으로 생각해서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성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했느냐에 오로지 초점을 맞춘다. 이미 여자의 마음은 그를 떠났음에도 성행위 여부에만 집착한다.

 

이렇듯이 남자와 여자의 성()은 많이 다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언급했던 것처럼 남녀가 한 몸이었으면 없었을지도 모를 이러한 차이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나라 이혼율은 OECD국가 중에서 최정상이다. 새로 결혼한 부부 3쌍 중 한 쌍은 이혼을 하는 꼴이라고 한다. 그 많은 이혼 중 가장 많은 이혼 사유가 바로 성격차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실제로는 성격차이(性格差異)가 아니라 성적차이(性的差異) 혹은 성성적차이(性成績差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이 관계의 유지와 마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희화화하지 않아도 성격차이의 근본은 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성()에는 전인적·인격적인 마음이 담겨 있어 성()의 격()이 달라진다는 것은 이미 그 속에 성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요소임에도 전통적으로 우리는 성()에 대한 얘기를 터부시해왔다. 공개적으로는 물론 가장 깊숙한 대화를 나눠야 할 부부간에도. 그러다 보니 사랑하는 만큼 오해도 커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한다. 대화를 기피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질투의 틈입이다. 대화를 하려다 질투가 방해를 놓아 커다란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질투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악마가 천사의 동생인 것처럼 질투는 사랑의 누이다라는 얘기가 있다. 질투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을 할 때만이 질투가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에서 질투가 들어와 앉는다면 그것은 부부가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다만 질투의 속성상 잘못하면 그것은 파멸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성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성에 대해 오해가 생기면 사랑도 오해가 생긴다. 남편과 아내의 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그래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의 깊은 대화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신나는 가정을 위한 펀경영>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