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분화암이라고 하는데요. 예후가 가장 좋지 않은 암입니다. 암도 착한 암이 있는데 이 암은 암 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암이예요.”
“좋지 않다는 말씀은?”
“치유가 어렵다는 말씀이지요.”
“아직 검사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요. 폐CT도 그렇고.. MRI도 찍어 보지 않았는데…”
“폐CT는 폐에 암이 전이되었나를 보는 것인데 전이 여부에 관계없이 수술은 어렵습니다. 수술해도 나아질 것이 없으니까요. 얼마 전 젊은 여자 환자도 같은 암으로 수술을 만류했는데도 수술을 하셨지만 곧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다면 얼마나 있다가…”
“보통은 6개월 미만입니다. 그 젊은 여자 환자도 수술후 6개월을 넘지 못했으니까요.”
형을 진찰 후 내분비외과 배교수님이 형을 진료실에서 내보내고 보호자로 따라 간 날 불러 한 얘기였다.
형이 쉰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약 두어달이 넘었었다. 왜 그러냐니까 감기 때문일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전 갑상선암을 경험했던 동생을 두었다는 형 친구가 목둘레를 보더니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걱정으로 찾아간 S종합병원 의사는 조직 검사를 하자고 하였고 조직을 떼기 위해 주사바늘을 찔렀으나 주사 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도 딱딱했다고 한다. 조직검사에서 초기 진단은 미분화암이었단다. 생소한 용어로 어리둥절해 있던 형에게 의사는 매우 좋지 않은 암이라고 하면서도 몇가지 용어를 오히려 간호사에게 물어보는 등 신뢰를 주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큰 누님으로부터 어머니와 형님 동생하는 분의 아들이 의사로 있는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길 것을 종용받았다한다. 그 의사는 형도 아우로 부르는 아는 동생으로 정확한 병명을 알고 싶어 연락을 하고 병원을 옮기기로 결정을 하였다 한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그 아우에게 연락을 하기로 하고 일단 병원에 예약을 하고 우선 내분비 내과 전문의와의 진료를 예약했다 한다. 내분기 내과 전문의는 S 병원에서 5만원을 예치하고 빌려온 조직 샘플과 검사 기록을 보더니 미분화암이 맞다고 빨리 서둘러야 한다고 내분비외과도 예약을 하고, CT, 폐CT촬영도 하라고 하였다.
이 병원에 오기 전 암에 문외한인 형이 다시 그 갑상선암을 경험했던 친구에게 물어보았단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감상선암은 암 중에서 가장 쉬운 암으로 수술만 간단히 하면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단다. 집에 가서 그동안 여러가지 문제로 데면데면 살아온 형수에게 말했더니 “참, 가지 가지 하네.” 그랬단다. 형이나 형수 모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강남성모병원의 내분비내과 임교수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동행한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료를 하는 내내 의사의 얼굴표정이며 촉박하게 서두르는 모습이며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금요일에 진료를 하고 내분기내과 교수가 하라고 알려준 검사와 진료 일자를 예약하려고 했더니 CT는 월요일, 폐CT는 목요일에 예약이 되고 내분비 외과 교수 진료는 토요일에 예약을 하라고 한다. 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 역시 느닷없는 불길한 소식에 놀랐으나 함께 걱정하면 안될 것 같아 별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검사만 두 군데 예약을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에서 갑상선 미분화암을 검색해 보았다. 갑상선 암환자의 1~5%에만 발생하는 희귀한 암으로 발병 즉시 4병기인 암 중에 가장 심각한 암으로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나와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어시간을 계속해서 검색해 보았지만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너무나 속이 상해 수퍼에 가서 소주 두병을 사서 연거푸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와이프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걱정할 것 같아 얘기하지 않았다. 술만 연거푸 들이켜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TV만 응시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지 못할 서러움에, 걱정에, 안타까움에 그리고 가장 크게 미안하고 죄송함에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내 입에서 나온 얘기는 “병신 같은 X. 그렇게 죽을려고 여태껏 이렇게 살았나…”였다. 불쌍함과 미안함과 자괴심 등이 한꺼번에 몰려 오면서 그렇게까지 될 정도로 병을 체감하지 못한 형의 무지와 무감각에 하지 말아야 할 혼잣말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한 아내도 소리없이 옆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그렇게 심각하냐고 물어왔다. “길어…어…야…아… 6개월…바…밖에…에…모…옷….사…안…데….에…”
꺼이거이 거리면서 겨우 말하고 나니 내 얘기에 내 스스로가 더 슬퍼져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좋지 못한 상황을 보여주려고 결혼을 한 것이 아닌데 아내에게도 너무나 미안하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싫고 미웠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주 두 병을 비우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깨질듯한 두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의 주량보다 많이, 그것도 짧은 시간에 폭음을 한 간밤의 슬픔은 처참한 꼴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파에 너부러져 있고,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구토로 소파의 한 쪽과 바닥이 토사물로 엉켜져 있었다. 시계를 가장 먼저 찾았다.
10시 반쯤 아내가 멀리서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머리는 아프고 속은 메슥거렸다. 지금 일 때문에 나가 봐야 하는데 콩나물국을 끓였으니 마시란다. 겨우 일어나 소파에 앉아 두 그릇의 콩나물국을 마셨다. 소파와 바닥을 보니 아내가 한 차례 닦아낸 모양이었다. 여전한 숙취에도 미안하여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화장실에 가서 물을 묻혀 가지고 와서 소파와 바닥을 닦아내었다. 말라 눌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대충 닦는데도 너무 머리가 어지러워 그만하고 다시 소파에 누웠다. 아내가 나갔다 온다고 하고 사라졌다.
혼자 덩그러이 소파에 누워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으려니 불쌍한 형의 상황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심이 또 한 차례 눈물과 함께 엄습해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