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바와 깔리 Shiva and Kali
(쉬바 - 티베트 사람들이 남성의 근원적인 에너지체를 신격화하여 붙인 남성신의 이름. 깔리 - 티베트 사람들이 여성의 근원적인 에너지체를 신격화하여 붙인 여성신의 이름.)
* 여자와 남자는 왜 끊임없이 싸우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자연의 이치에 근거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남녀가 행복할 수 있는 길, 남자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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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쌓는 여자, 담을 허무는 남자
아주 오랜 옛날 이 지구상에 인간이 아직 탄생하기 전에 하늘에는 어떤 신비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계에 사는 신들은 이상한 짓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신 하나가 열심히 담을 쌓고 울타리를 지어 건물을 하나 지어 놓으면, 다음 날 다른 신은 그것을 열심히 허물어 버리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하느님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얘들을 여기다 그대로 내버려두어선 안 되겠군. 차라리 얘들을 저 땅으로 보내서 자기들이 매일같이 반복하는 저 짓거리를 자각시키도록 해야 되겠어.’
그리하여 매일같이 담을 쌓던 신과 매일같이 담을 허물어 버리던 그 두 신은 척박하고 메마른 이 땅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마치 담을 쌓아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기능과 담을 허물어 버리는 것과 같은 기능의 두 가지 부류의 기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역시 담을 쌓는 식의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담을 허물어 버리는 식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크게 나누어 <남자>와 <여자>라고 구별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상반되는 기능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무너뜨리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자는 여자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여자 또한 남자에게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는 남자만으로, 여자는 여자만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남자만 존재하고 여자가 다 없어져 버린다면 이 세상은 어디로 가도 안주할 만한 보금자리가 없는 삭막하고 거친 세계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 여자만 존재하고 모든 남자가 없어져 버린다면 그들이 창조해낼 수 있는 행복은 발붙일 곳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은 아주 캄캄한 암흑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그 보금자리와 행복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남성과 여성이 균등하게 존재하게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호기심을 갖게끔 그렇게 세심한 배려를 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나 기차를 탈 때, 가만히 정지해 있는 자동차에 탔을 때는 ‘자동차에 앉았다.’라고 말하지만, 달리고 있는 자동차에 탔을 때는 ‘자동차를 타고 달려간다.’라고 말을 합니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차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을 먼저 느끼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신나게 달리고 있다는 것을 먼저 느끼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태 안에서 어느 한 쪽을 먼저 취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차를 타면, 차가 편안하다든가 불편하다든가 하는, 차에 앉아 있다는 상태를 먼저 느낍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달린다는 느낌을 먼저 갖습니다. 그래서 시선이 차창 밖으로 먼저 향하게 됩니다.
그렇듯 여자는 집에 있으면 집 안에 앉아 있는 자기를 먼저 느끼면서 계속해서 담을 쌓는 것으로써 자기의 삶을 만들어내고 있고, 반면에 남자들은 집밖으로 달리면서 쌓아 놓은 담을 허물어뜨림으로써 허물어뜨린 담의 크기만큼을 자기의 크기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남자만으로 생겨났거나 여자만으로 생겨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남성 세포와 여성 세포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세상에는 남자만인 남자나 여자만인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자 안에도 여자가 있고, 여자 안에도 남자가 존재합니다. 그대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 당신의 반은 남자이고 반은 여자입니다. 그러면 그대 안에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고, 남자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하나의 물방울이 있을 때, 그 물방울은 스스로의 표면을 최대한으로 수축하여 동그란 방울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표면장력’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물방울 자신이 스스로 하나의 완성을 이루려고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구심력입니다.
여자의 깔리(티베트 사람들이 여성의 근원적인 에너지체를 신격화하여 붙인 여성신)적 에너지는 바로 그와 같은 구심적 에너지입니다. 그와 같은 여자의 에너지를 만화로 그리라고 한다면, 어떤 만화가는 그것을 오징어나 낙지의 발에 붙어 있는 빨판처럼 그릴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여자는 마치 문어의 빨판처럼 그렇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어디든지 붙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붙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즉 붙어 있는 대상과 일치감을 가지면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안심하는 것입니다. 그렇듯, 여자는 자기가 붙어 있는 대상과 일치감을 가지면서 스스로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자기가 붙어 있는 대상과 얼른 하나가 되면서 행복의 완성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면 문어의 빨판처럼 사물에 달라붙을 수 있는 여자의 힘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의 물방울이 물방울로서 둥글게 완성되지 못했을 때, 그 구심력은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축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접하고 있는 대상에 대하여 흡착하려는 힘을 갖습니다. 그 힘이 바로 남자를 유혹해 내는 여자의 무기인 것입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물방울이라는 크기 안에서만 자기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여자는 집을 지을 때 바깥에서부터 집을 짓지 않습니다. 울타리를 쌓을 때도 바깥에서부터 울타리를 쌓지 않습니다. 여자는 안에서부터 집을 짓습니다. 자기 몸이 중심이 되어 벽돌을 하나씩, 하나씩 쌓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가서는 벽돌에 뒤덮여서 자기는 그 안에 갇혀 버립니다.
기름종이 위에 물방울을 올려놓고 잘 관찰하면 알 수 있습니다. 물방울의 구심력적인 힘은 그 특유의 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입김만 후하고 불어도 곧 부서지거나 터져 버릴 것 같은 물방울이지만, 막상 물방울에 입김을 불어 보면, 물방울은 흔들흔들 하고 망울망울 하면서도 결코 자기의 동그란 탄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톡 건드리면 부서져서 주저앉는 게 아니라, 떼구루루 구르면서도 자기의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탄력 있는 하나의 방울을 유지시켜 냅니다.
여자가 남자와 데이트할 때 밀치는 듯하면서, 퉁겨내는 듯하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입니다. 여자들의 구심적이면서도 빨아 당기는 그 힘은 한편으로 보면 퉁겨내고 밀쳐내는 힘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여자들의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협력이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여자들 셋이 모여서 이야기할 때를 보세요. 그들은 서로가 제각기 자기의 이야기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 않습니다.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세 명의 여자가 똑같이 모여서 똑같이 실내 장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들은 마치 각기 다른 세 방송국의 방송을 틀어놓은 것처럼 각자 다른 취지의 각기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기름종이 위에 물방울 세 개가 각기 따로 존재하면서 같은 소재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 물방울은 달라붙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젖을 수 있는 어떤 것과 달라붙어서 서로 합칠 때 보면, 대단히 강력한 힘으로 달라붙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면 그녀는 곧 그 남자에게 달라붙어 그 남자와 똑같이 동화되어 버립니다. 여자는 시멘트벽에 붙어살면 시멘트가 되고, 매미처럼 나무에 붙어살면 나무가 됩니다. 여자의 손길이 거듭해서 닿게 되면 그것은 곧 그녀의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자기의 안으로 축적시키려 합니다. 마치 문어발에 달려 있는 빨판처럼 여자는 그 특유의 탄력을 가지고 빨판의 세계를 완성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빨판과 빨판의 세계를 하나의 완성품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완성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달라붙어 있는 세계가 안전하기만 하다면 여자는 몹시 안정된 세계를 향유합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기 존재를 확신합니다.
그러면 남자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남자는 고정된 형체가 없습니다. 사실 여자가 볼 때 남자에게는 실속이 없습니다. 남자에게는 형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세계를 물방울에 비유한다면 남자의 세계는 물방울의 흘러내림과 같습니다. 흘러내리는 원심력, 그것이 바로 쉬바(티베트 사람들이 남성의 근원적인 에너지체를 신격화하여 붙인 남성신)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과 같습니다. 울타리를 허물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존재입니다.
남자는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이 집을 허물자.’라고 했을 때, 남자는 집을 허뭅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문 그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여깁니다. 남자가 나무를 잘라내면 자기는 나무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벽돌을 허물면 벽돌을 허문 그 능력이 곧 자기인 줄 알고 있습니다.
창문에 하나의 물방울이 흘러내려 갈 때 언뜻 보기에는 물줄기 하나가 주욱 흘러내려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흘러내려 가는 순간 순간, 물방울은 방울이라는 구심력을 그대로 가진 채, 흘러내린다는 그 흐름의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자기가 물방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는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자들 셋이 모여 이야기할 때를 보세요. 그들을 제각기 흘러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제동을 겁니다. A가 말합니다 ‘그게 아니고…….’ 그리고 나서 자기 의견이 흐릅니다. 그러면 B가 ‘아니야, 그게 아니라…….’ 그리고 자기 의견을 흘려 보냅니다. 그러다가 모처럼 그 흐름이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면 C는 반가워하며 말합니다. ‘그래 맞았어! 바로 그렇다니까.’ 하면서 서로 친한 척하고 친구가 됩니다.
남자들은 흘러야 사는 맛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은 울타리를 쌓지 않습니다. 쌓기보다는 허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 앞에 쌓여 있는 어떤 답답함을 허물고 싶어서 오늘도 대폿집에서 술 한잔 들이켜기를 좋아합니다.
남자들은 쌓기보다는 허물어뜨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물어뜨린 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벽돌을 잘 허문다. 나에게 벽돌을 다오.”
그는 스스로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벽돌이 아닌 나무를 자르라고 하면 그는 말합니다.
“나는 벽돌을 잘 허문다. 그러나 나무는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나무를 주지 말고 벽돌을 다오.”
그러나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나무가 되었든 벽돌이 되었든, 그것을 허무는 방식에 있어서는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잘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벽돌을 잘 허문다면, 벽돌 허무는 것을 익힐 때의 그 방식으로 한다면 무엇이든 그렇게 허물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말합니다.
“나는 벽돌만 깨뜨려 왔기 때문에 나무는 자를 수 없다.”라고.
남자의 기본적인 능력은 나무나 벽돌에 있는 것이 아니고 ‘허물 수 있다’고 하는 것, 곧 흐른다고 하는 물줄기, 그것이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입니다. 옛날 티베트 사람들은 그와 같이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와도 같은 원심력적인 남성 에너지체의 세계를 ‘쉬바’라고 했습니다.
한편, 여성 에너지의 능력은 대단한 행복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나무에 붙어 있든지, 시멘트 바닥에 붙어 있든지, 밀착해 있는 만큼의 붙어 있는 그 세계 안에 어떤 편안한 세계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빨판 안에 존재하는 그 세계는 비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는 진공과 같은 상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힘의 세계입니다.
그 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융해시켜 버릴 수 있고, 그 대상 세계가 가지고 있는 모든 성질을 녹여서 해체시킬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빨판 안에 존재하는 신비한 힘의 세계를 가리켜 티베트 사람들은 ‘깔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