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얼른 일어나! 지금이 몇 시인데 여태 자니?”
그같은 숙부님의 불호령에 와락 눈을 뜬 건 당연한 반사적 행위였다.
눈을 뜬 즉시로 손목시계부터 보았다.
으악~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담!
시계는 평소의 등대(登隊=부대 출근)시간인
오전 7시를 한참이나 지나 10시를 갓 넘어서고 있었다.
순간 ‘난 오늘 죽었다!’는 후회막급의 자괴감과
한탄이 그야말로 쓰나미로 몰려왔다.
그날 그처럼 처음으로 근무지의 부대(部隊)에
지각을 하게 된 연유는 전날 밤 날 찾아온
죽마고우와 늦도록 대작(對酌)을 한 때문이었다.
“방위 받느라 힘들지?”
“아냐, 작은 집(숙부님 댁)에서 먹고 자고 하니까 딱히 어려운 건 없어.
그나저나 넌 언제 입대하니?”
“응, 조만간 갈 거 같애.”
지금도 기분이 좋은 때면 한 자리서 소주를
세 병까지는 너끈히 마시는 주량을 자랑한다.
지천명도 넘은 중늙은이의 오늘날이 이럴진대
돌도 삼킬 나이라고 하는 20대 초반의 열혈청년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대략 갑절 이상의 술은 그야말로
물처럼 술술 넘기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술꾼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술에는 역시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전날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말미암아
나는 그처럼 늦잠에 함몰되었던 것이다.
하여간 이젠 큰일 났다 싶어 속칭 개구리복(당시 방위병이
착용한 향토 예비군과 비슷한 ‘군인’ 복장을 세인들은 이렇게 불렀다)을
서둘러 꺼내 입곤 죽기 살기로 당시 내가
근무했던 동대(洞隊)의 상급기관인 읍대(邑隊)를 향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오는
읍대의 좌측엔 온양역 바로 앞에 위치한
국기 게양대가 먼저 내 두 눈을 모으게 했다.
순간 기쁘기 그지 없었다!
게양대엔 내가 그날 빼먹은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 게양을, 하지만 누군가가 대신하여 해 주는 바람에
그날 역시도 바람에 자랑스레 펄럭이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여하간 죄인은 죄인이었다.
읍대로 들어서는 문을 여는 내 손마디는
당연히 적잖이 후들후들 떨고 있었으니 말이다.
읍대 입구의 조그만 화단엔 좌우로 무궁화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그 녀석들조차도 날 비웃는 듯 했다.
“오늘 너의 농땡이는 딱 얼차려감이야!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으나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도 있잖니!”
‘.......!’
“멸공~”
흡사 집을 나갔다 기어 들어오는 며느리를
바라보는 투의 멸시적 매서운 눈초리의
소대장은 나의 거수경례마저 의도적으로 도외시했다.
하여 그날따라 어깨에 붙인 소대장의 견장은
나를 더욱 움츠러뜨리는 공포스러움의 절정이었다!
“지금이 몇 신데 이제 나오냐?
이 자식, 군기가 쏙 빠져가지곤...”
소대장의 그 말은 얼차려의 암묵적 지시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읍대의 무기고가 위치한 곳으로 끌려가
한 시간 이상이나 지독한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면 나는 어쨌거나 당시 ‘군인’ 신분이었기에 말이다.
그것도 만날 아침이면 온양역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이 당시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니까!
여하튼 그날의 ‘봉변’ 이후 후일 내 대신으로
아침마다 태극기를 온양역 앞에 게양해야 하는
후임병이 오기까지는 절대로(!) 밤늦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랬다가 또 얼차려를 당하면 나만 손해였으니까.
당시엔 충남 아산군 온양읍 온천리로 불리었던 곳이 현재의 아산시다.
이제는 서울서 출발한 전철까지 내려오기에
명실상부하게 준(準) 수도권으로까지
그 위상이 급격히 업그레이드된 도시, 아산시.
시대에 걸맞게 증축(增築)되어 현재도
여전히 꼿꼿하게 엄존하는 곳이 또한 온양온천 역사(驛舍)이다.
행인들은 오늘도 그 앞을 분주히 오가며 여전히 간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그 시절 그 역 앞에 매일 아침마다
일찍 나가 태극기를 게양치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절체절명의 나날을 한참동안이나 살아야 했던 방위병 시절이 묻어있다.
이러한 일련의 곡절 때문일까...
내가 지금도 여전히 ‘아침형 인간’으로써
누구보다 빠른 아침을 맞고 있는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