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에 대한 기억은 벚꽃나무가 피어있는 언덕배기 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이 언덕이지 거의 관악산 꼭대기와 맞먹는 높이에 위치한 학교를 등교하려면 등반할 때만큼의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 어께엔 무거운 책가방을, 한손엔 두끼를 해결하기 위한 큰 도시락 가방을 들고 새벽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다 보면 시야에 보이는 건 하나같이 굵직한 조선무들의 움직임뿐이다.
만약에...조금 늦잠을 자서 지각이라도 할 순간이 오면 등반하느라 숨이 턱밑에 찼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을 향해 정상을 향해 질주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의 마지막 사투이므로 그것은 질주가 아닌 처참한 몸부림의 슬로우 모션이 된다.
정문 앞에서는 학생주임 혹은 체육선생이 저승사자의 표정 내지는 죽을 힘을 다해 기어오고
있는 여고생들을 마치 승리자와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지각 라인에 걸리면 교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정문에 붙들려 있거나 거기다 복장불량까지
걸리면 가중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때의 우리는 교복을 입지 않는 대신 무조건 치마를 입어야 했고, 머리핀이나 끈은 교내에
수녀원이 있어 항상 검정색만을 착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각라인을 무사히 통과하고 났을때의 그 안도감은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성취감만큼이나 기쁘기 그지없다. 높은 곳이라 바람이 땀까지 식혀주니 또 얼마나 시원했을까나
일단 수업이 시작되면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벚꽃나무의 꽃들이 눈처럼 바람에 흩날리면 수업을 듣다가도 창밖을 바라보게 된다.
난 그때부터 ‘사월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냥 수업이고 뭐고 이대로 나가 벚꽃나무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고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불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으니까.
그리고 머나먼 이국땅의 외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싶은, 머언 미래에 대한 동경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평화롭고 한가로운 시간은 유일하게 점심시간 뿐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의 교실엔 잠자는 아이, 그 시간이라도 아껴서 악착같이 공부를 하는 아이, 그리고 미친듯이 떠드는 아이들이 남아 있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운동장이나 벚꽃나무 아래의 교정에서 산책을 하거나 수다를 떨었다.
난 어디에 속했냐 하면 주로 교실에 남아서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였다.
벚꽃동산에 갈 때도 있었지만, 자주 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난 그 당시 국어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벚꽃동산이나 교정엔 늘 항상 그 선생님과
선생님께 고민을 개인적으로 상담하러 간 아이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옆반 담임이셨고 무척 인기가 많으셨다.
나이는 30중반에 무척 유명하신 분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 내용을 책도 내셨고 지금은 유명화백이 되신 분과도 죽마고우셨기 때문에 그런 분이 우리를 가르치는 국어선생님이란 사실이 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분의 선생님으로서의 가치관이나 생활됨됨이는 평소 선생님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고 좋아함을 넘어서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정신이 퍼뜩 들어섰을 때는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를 배울 때였다.
낭만적인 시,수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지은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말씀..
그 뜻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그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래서일까?
고1의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는 막연히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문학이 그냥 하나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그것이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던 것이다.
시인,문학가에게 시대의 아픔에 대한 책임감이 뒤따른다는 말은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냥 개인적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인데 사상과 책임까지 결부시키는 것은 이해가 안간다며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태도였다.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어울리는 시간보다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청소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누구보다 열심히 청소를 하셨다.
선생님은 담임을 맡은 반이 아닌, 수업에 들어가는 반의 90%이상의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 그때 최소한 6개 반 이상 들어가셨으니 우리 학년의 절반 이상의 아이의 이름을 알고 계신 셈이었다.
그것은 다른 선생님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다른 반 선생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선생님이 좋았다.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면서 1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시계가 원망스러웠고 그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활자화가 되어 또렷이 박히는 것이었다.
세상엔 참 적극적인 여자애들도 많지..
난 수줍고 부끄러워서 선생님한테 감히 고민같은 걸 꺼내서 상담하자고 할 용기조차 없는데
저 것들은 무슨 고민이 많다고 넙죽 찾아가서 위로를 받는담...
속에서 질투 비슷한 감정이 부글부글 올라 벚꽃동산에서의 그 꼴을 목격하는 것이 싫어서
교실 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겨우 1년 반을 우리를 가르치고 떠나셨다.
떠나가는 날 몇 명의 아이들은 실신을 해서 실려가고 많은 아이들이 교실에 쓰러져서 울었다. 아이들이 와 이라노...이를 우짜노...하시면서 당황하시는 모습이 내가 본 마지막 기억이다. 그 해 여름은 너무 더웠고 나역시 눈물 범벅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교사로서의 꿈을 접은 건 아마 그 때였던 것 같다.
대학 진로문제로 학교에 가신 아버지는 고3 담임과 옥신각신하고 오셨다.
내가 교육대를 진학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와 교대 가기엔 점수가 아깝다며 다른 학교를 권유한 담임과 의견이 맞지 않으셨던 거였다.
지금에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시대의 교대가 서울대만큼이나 높은 곳이 될줄 그때는 상상조차 못했으니 순간의 잘못판단이 평생에 이어진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어쨌든 교사로써의 꿈은 이미 접었으므로 다 의미없고 부질없는 소리이다.
그리고 십몇년이 흐른 후에 우연히 ‘PAPER\'란 잡지를 보게 되었는데 어떤 학생이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을 독자코너에 투고한 것을 보게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학교는 남동생이 졸업한 고등학교다.
복직이 되셨구나...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리고 얼마나 다행인지..
사진 속의 선생님은 하나도 안변하시고 그 시절 모습 그대로 아이들과 웃고 계셨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4월이 되면 늘 마음은 벚꽃동산에서 사월의 노래를 부른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온다면 이젠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선생님과 벚꽃피는 교정을 함께 걷고 싶다.
올해의 4월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잔인한 4월이지만, 추억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