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에 제주에 내려갔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올해 97세의 시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시동생의 전화를 받고서
부랴부랴 그렇잖아도 한 번 다니러 가려던 일정을 앞당긴 것이다
(참, 그동안 혼자였던 내가 인생2막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 사람과 동행을 한 것이다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충분한 교제 기간이 있었기에 마음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이렇게 인생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3년 전에 함께 찾아 뵈었던 적이 있었는데 치매에 걸려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상대방이
늘상 마음에 걸려 하는 부분인지라 기꺼이 그 사람의 뜻
(혹시 집으로 모셔 오면 상황에 따라 며칠이라도 우리가 수발을 들기로 한 생각)을
따라 주기로 마음을 정하고, 제주행을 하였다
혹시 고비를 못 넘기시면 초상까지 치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려간 것이다
제주는 육지와 달리 결혼이나 장례 풍습이 독특하다는 얘길 들었기에 내심 염려도 되긴 했다
도착하여 요양병원으로 찾아 뵈니 다행히도 고비를 넘기시어 휠체어에 앉은 채 가족들과
만남을 할 수 있었다
가족을 만난 어머니는 눈동자에 아직은 힘이 있고, 떠드리는 죽을 꼬박꼬박 받아 드시는 걸
보니 아직은 괜찮으신 듯하여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가면서 삶을 누리는 게 아니라 가장 본능적인 일만
가능한 상태에서는 살아 계신다 한들 지켜보는 자식이나, 그렇게 꼿꼿한 자존심으로
4남매를 혼자 키워내셨다는 어머니의
평소 생활태도로 보나 참 힘든 일이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식을 봐도 반가운 기색도 없고, 뭐라고 말을 시켜 봐도 대답도 못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그 사람을 보니 나 역시도 자꾸 콧날이 시큰거렸다
치매가 그렇게 진행이 안 되셨을 때 입버릇처럼 \"서울가서 너와 한 달만 살고 싶다!\"고 하셨던
어머니 소원을 못 들어드린 채 요양병원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자신의 상황을
안타까워 하니 곁에서 지켜 보는 나도 그 사람의 쓰린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상황이 위중하셨다면 집으로 모셔서 임종을 기다렸을텐데 그럴 단계는 아닌지라
가족들만 어머니가 안 계신 어머니 집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가족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둘만 남아 저녁을 해먹고 나니
서울에 있을 때만해도 온갖 소음에 시달렸는데 바람소리만 들리는 고즈녁한 시골 분위기에
젖어 모처럼 한가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은 그동안 벼르기만 하던 제주올레에 나섰다
\'놀멍 쉬멍 걸으멍\'이란 책을 읽으며 직접 걸어보진 않아도 간접경험을 하며
아쉬움을 달래곤 했는데 내려온 목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올레길을 걷게 되었으니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이제는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갈수록 복잡한 도시 소음이 싫고, 아둥바둥 거리는 삶에서도
한발짝 물러나 조촐하지만 소박한 시간을 만들고 싶다
한적한 시골길, 탁트인 드넓은 수평선, 지천으로 깔린 노오란 유채꽃의 향기에 취해
올레길을 걸어 보기로 결정을 하고 간단히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오래 전부터 제주는 내겐 아끼고 싶은 이상향이었기에 두 번째 찾아간 봄의 제주는
숨쉬기도 아까울 환상의 섬으로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용머리 해안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손에 잡힐듯 다가오는 하얀 파도에 깔깔거리며
다시 소녀가 되어 모래사장을 걸어 보고 광활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슴 속까지
시원스레 씻어 내고...
눈에 띄는 곳마다엔 유채꽃이 만발하여 섬 가득 향기가 진동을 하고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초록이 한창인 제주는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참, 요즘 SBS 주말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세트장 앞에서 기념사진도 찰칼찰칵
세트는 별거두 아니건만 방송에 나올 때는 완전 멋있게 나오기에 간 김에
남는 건 사진이라 몇 장 찍었다
(제주말로 블란지는 개똥벌레라네요 난 무슨 외국말인줄 알았구만...)
올해는 작년에 신종플루땜에 미뤄졌던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이 많아 곳곳에 전세버스가
줄을 지어 다니는지라 관광지임을 느끼게 하였다
제주는 가면 갈수록, 보면 볼수록 무궁한 매력이 있는 곳이라 제주가 고향인 사람을
만난 게 서로의 인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머니 덕분에 눈 호사, 입 호사 실컷 하고 온 제주의 봄은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니, 아끼고 아끼면서 서울살이가 싫어질때면 훌쩍 내려갈 수 있는
고향처럼 마음이 푸근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