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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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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동창회


BY 그대향기 2010-03-29

 

 

지난 토요일.

낮시간이 아닌 저녁시간대에 여고동창회가 있다고 카페에 공고문이 올라와 있었다.

여고동창회......

30년도 더 지난 여고시절.

단한번도 여고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았었는데....

 

바지를 입고 갈까?

스커트를 입고 갈까?

옷장문을 열어두고 이옷 저옷을 걸쳐보다가 결국엔 깔끔하고 심플한 옷으로 결정을 했다.

주렁주렁 뭐가 달린 옷도 아니고 검정색 상의에 흰색이 앞 라인에만 들어간 것으로 하고

바지는 샤방샤방 ...찰랑대는 바지 역시 검정색으로 통일.

핸드백도 까만색에나멜에 은색금속장식이 촘촘히 박힌 시상식에 나오는 연예인스타일.ㅋㅋㅋ

어쩌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이런 핸드백을  장만했던가 싶다.

아무래도 난 좀 튀고 싶었던가보다.ㅋㅋㅋ

신발은 좀 과감하게.

오픈 슈즈였는데 앞에는 트이고 까만 에나멜에 굽은 하얀색이고 앞트임 부분에 물빛 비즈가 제법 크게 박힌

좀은 과감하고 화려한 신발이었다.

큰 딸을 시집보내면서 둘이 똑 같이 맞추었던 신발이다.

 

그 동안에는 솔직히 부끄러운 말이지만

어디가서 대 놓고 나 이런여고 나왔습니다~~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했었다.

찬란해야했던 내 여고시절이 밤잠과의 전쟁이었었고

출근시간대에 자던 그 토막잠 속의 여고생 갈래머리는

섬유나부랭이가 잡아먹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야간근무를 할 때는 잠시라도 틈만나면 구석에서  잠을 잤고

새벽반일 때는 겨울 칼바람을 안고 출근하던 그 골몰길이 너무너무 멀고 길기만 했었다.

오뉴월 푹푹 찌던 찜통더위에는 기계열에다가 섬유의 열기까지 온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었다.

어린 소녀들은 그래도 여고졸업장을 품에 안기위해서  삼교대를 했었고 모자라는 잠은 수업시간에

졸면서도 공부의 갈증을 풀어나갔었다.

남한팔도 전국에서 모인 여고생들이었기에 사투리도 가지각색이었고 연령대도 다양했다.

나처럼 제 때에 진학한 학생도 있었지만 서너살이 더 많은 언니뻘도  많았었다.

같은 동급생이었지만 서너살 나이가 많으면 꼬박고박 언니라 불러줬고.

 

집안이 기울면 한쪽만 기울던지

아버지의 실명에 오빠의 토지 대사기사건까지 겹치니

엎친데겹친 우리집은 일어설 기력조차없었고

중학시절 잘 나가던 총학생회장의 고민은 혼자만의 가슴앓이였었다.

 

여상과 같이 있었던 중학교학생회장을 산학협동의 여고에 안 보내시려고

중학교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은 전액장학생으로 여상을 권유하셨지만

아버지의 폭음과 폭언에 지친 난 도망치듯이 마산으로 내 앞날의 방향키를 돌렸다.

오빠들의 반대에도 엄마의 눈물도 내 생각을 바꾸진 못했다.

가리라..내가 벌어서 여고졸업장도 따고 돈도 모으리라.

 

열여섯...꽃다운 내 어린날은 삼교대 근무 속에서 점점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낡아졌고

제법 한다고 하던 공부에 대한 미련도 시들어져만 갔다.

중학교 친구들한테는 진짜 말하기 싫어서 산학협동의 여고에 간다고 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고향에 가서 가끔 만나는 중학교 친구들은 내가 어느 여고에 나왔는지 잘 모른다.ㅋㅋㅋ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고.....

 

처음엔 부러 잊었고 나중엔 생활이 바빠서 잊었던 이름 여고동창회.

작년부터 여고동창회카페를 들락거리면서 소식도 듣고 드디어 지난 주 토요일.

큰 맘 먹고 좀 차려입고 약속장소로 향하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한학년에 30 학급씩..... 올해로 동창회 34년,  짧은 역사속에 졸업생이 무려 6만5천명이란다.

마산..대구..수원..김해

그 때는 고등학교도 못 보내는 가정들이 왜 그리도 많았던지.

 

지금은 스스로 돈벌고 고등학교 졸업하라면 얼마나 버텨줄지.ㅎㅎㅎ

지금은 이름만 바꿔서 우리 때보다 적은 학생수가 있다는데 그 때처럼 절실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밤에 소등을 하고나면 복도에 나가서 이불 뒤집어 쓰고 공부하던 애들은 대학도 들어가고

교수님에 박사님까지 된 친구, 후배들도 많은데 난 뭐냐~`ㅎㅎㅎㅎ

고등학교 1~2학년 때까지는 잘하다가 그만 3학년 때 공부에 대한 흥미를 아주..잃고말았다.

 

학생회간부에 부서활동도 재미있게 잘했었는데 어느 순간 그 모든게 재미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3학년 졸업장만 받고 그날로 회사에 사표를 쓰고 마산을 떠나와버렸고...

내 여고졸업장을 따게 해 준 고마운 회사였고 학교인데도 왜 자랑스럽지가 않았던지.....

내 인생이력서 중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3년인데도 왜 자존심이 상하던지.....

그날의 그 고난을 이긴 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건데도 떳떳하게 자랑삼지 못했던 나.

 

늘 일반고등학교를 다녔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궁금했다.

그냥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추천하는 여상을 나왔더라면???

만약에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 어땠을까?.....

다 나의 부질없는 자존심이고 짧은 소견으로 빚어지는 상처들이다.

그래서 내 아이들한테는 나같은 전철은 밟게 하지 않으리라 이를 악 물었고.

남편의 대학졸업장도 선물해 줬고.

 

이젠 서러울일도 ....안타까울일도 없는데 그 땐 그랬었다.

어린 나이라 자랑스러움보다는 부끄러웠고 교복을 입고 어딜 안 가고 싶었다.

공순이라고 볼 것만같았기에.ㅎㅎㅎ

이 나라 산업의 역꾼이었고 수출의 큰 몫을 담당한 자랑스런 여고생들이었는데 말이지.ㅋㅋㅋ

그 때 눈물의 월급을 모아서 빚에 넘어가려던 친정집도 찾았고 엄마의 생활비도 드렸었지.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했는데 가난은 분명 아주아주 너무 지독해.

 

다들 잘 살아줬는지 얼굴들이 환했고 넉넉해보였다.

지난 날의 고난을 디딤돌삼아 가정도 사랑도 성공했나보다.

모교에 장학금도 많이 보태고 지역사회에 봉사도 많이 하는 동창회가 되어 있었다.

이젠 한시간 거리에  살게 되었으니  종종 얼굴을 보이며 안타까웠던 여고시절을

늦었지만 자랑스런 여고시절로 자리바꿈을 해 줘야겠다.

부자 부모님덕에 유복한 여고시절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힘들긴해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자생력을 키우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