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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연재12-질투 jealousy


BY 사랑의 빛 2009-11-30

질투 jealousy

 

   

어느 일요일 아침에 우연히 TV를 보니, 부부 문제에 대해 상담해 주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자신들의 부부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한 여자와 사회자, 그리고 신경 정신과 의사 등이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가 자신들의 부부 문제에 대하여 얘기를 하면, 사회자가 거기에 대한 의견을 참석한 의사에게 묻고, 의사는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습니다.

의사가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는 장면을 보던 나는 갑자기 그 의사가 나도 모르게 싫어졌습니다.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었습니다. 나는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왜 갑자기 그 사람이 보기 싫어졌을까?’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의 반영이었습니다. 내 자신이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데 현재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 무의식 속의 소망을 비쳐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질투에서 나 자신의 진로를 찾은 셈입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나서 다음에 그 프로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그 의사를 봐도 마음에 아무런 질투심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무심해질 수 있었습니다.

 

관조를 통한 자기이해, 이것이 최상의 치료법이었습니다. 나의 본질인 ‘생명(순수의식)’이 주체가 되어서 ‘나(에고)’를 관조하고 이해하고 인내함으로써 사랑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마음은 우리 스스로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 <관조>와 <이해>와 <인내>의 방법으로. 그것은 사랑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정신과에 들락거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수많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가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막가파’, ‘지존파’라는 이름의 범죄 조직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당시에 저지른 행동들도 알고 보면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부자들을 미워한 것은 그들 자신이 부자가 되어서 멋진 차도 타면서 멋있게 살고 싶은데 실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분노가 사회적 범죄로 표출된 것입니다. 흰 그랜저를 탄 아줌마를 비롯한 몇몇 희생자들은 단지 죄를 저지르기 쉬운 하나의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정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들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 사건은 그들의 소망의 투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사회 정의를 생각했다면, 그들의 젊음을 불태워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고, 그 결실로 남도 돕는 그런 삶을 살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자신들의 마음을 관조하여 이런 사실을 이해했다면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 질투심이 분노로까지 발전하여 본인들의 인생을 회생 불가능한 구렁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내가 그녀와 한창 열애할 무렵의 일입니다.

어느 여름날, 그녀가 살고 있는 마을의 바닷가에 가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피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수영을 좋아했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갔기 때문에 텐트 밑에 앉아서 그녀가 수영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여름 바다의 정취를 흠뻑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수영하다가 멈추더니 어떤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동네 총각인 듯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일고 있었습니다. 나는 즉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왠지 편치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질투는 그녀를 나만의 여자로 소유하고픈 내 자신 속의 ‘나(에고)’가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해하면서 마음을 지켜보고 있었더니 어느 샌가 불편한 마음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숱한 질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는 없는 듯이 가만히 숨어 있다가 기회만 오면 즉각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치 땅꾼이 뱀의 머리를 낚아채듯이 자신의 질투심을 즉각 자각하여 그것이 분노나 스트레스로 진전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질투라는 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질투라는 독에 물려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질투를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 ‘나(에고)’의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나’입니다. 우리는 질투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 끊임없이 상처를 주게 되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분노가 되고, 우울증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피해망상증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매우 공격적입니다.

그들은 남들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화를 내고 분노하고 공격합니다. 매우 자기중심적입니다. 또 끊임없이 남들을 비난합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결코 사랑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현들은 말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길은 바로 자신의 ‘나(에고)’가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즉시 자각하고 그것을 관조하면서 이해하고 인내해 나가는 것입니다.

상대를 공격하거나 외부 탓으로 돌리지 못해 그 마음은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꿋꿋이 인내하다 보면 ‘나’의 상처는 서서히 아물고 그 상처가 어느새 사랑으로 변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파도가 곧 바다이듯, ‘나’라는 것도 사실은 생명(사랑) 에너지가 변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대한 연금술입니다.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