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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연재10-언어 language


BY 사랑의 빛 2009-11-12

언어 language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은 과연 무엇으로 할까요? 매우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과연 무엇을 매개로 생각을 할까요? 곰곰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말을 배우기 전에는 그림이나 느낌으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꿈을 영화처럼 영상으로 꿉니다. 아주 원시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이미 말을 배워서 알고 쓸 수 있을 때는 거의가 말로써 생각합니다. 쉽게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밤 잠자기 전에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이 과연 말을 통하지 않고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위대한 것은 이 언어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명의 이기가 이성을 통하여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논리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언어라는 것입니다. 언어가 없으면 사고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전쟁으로 휘몰아 넣었던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나 사상도 다 언어입니다. 이 세상에 말이 없고 글자가 없었다면 어디서 그런 주의나 사상이 전달되고 주장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사물과 존재를 표현한 이름들, 즉 언어들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어로 들어가 있고, 영어권 나라의 사람들은 영어로 들어가 있고,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각각 중국어, 일본어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른 언어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한국인들은 말합니다. “나는 한국인!”

일본인들은 말합니다. “나는 일본인!”

미국인들은 말합니다. “나는 미국인!”

이런 식으로 서로를 구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싸웁니다. 너는 일본인! 나는 한국인! 나는 미국인!

사실 이 세상을 모두 한 나라로 통합한다면 나라끼리의 싸움은 없어질 것입니다. 생긴 모습이야 수술을 통해서 다 비슷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더 가까운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전라도’라는 지역과 ‘경상도’라는 지역이 있다고 합시다. 이 두 지역은 운동 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지역이 축구 경기 중 싸움이 붙었습니다. 거기서 사상자가 100여 명이 났습니다.

과연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혀 싸울 이유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단지 ‘너는 전라도고 나는 경상도다. 우리는 지역이 서로 다르다.’라는 그 경험에 얽매여서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두 지역 사람들이 서로 이사를 가 버리게 되면 아무런 싸울 일이 없습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싸움의 그 순간 서로가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우리가 왜 이렇게 모여 있지?’ 하고 의아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쳐서 ‘화해도’나 ‘평화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바꿔 버린다면 그래도 두 지역의 갈등이 계속 될까요?

결국 그 싸움의 원인은 ‘나는 어느 지역 사람이다.’라는 경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언어에 불과합니다.

이 경험은 과거요, 기억이요, 죽은 것입니다. 이 죽은 것이 현재의 살아 있는 우리의 삶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험의 집합체가 곧 ‘나(에고)’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언어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있는지 단적인 예를 또 하나 들어봅시다.

 

한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한 미국인이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한국 대학생 몇 명이 그 미국인을 보더니 자기들끼리 한국인이 듣기에도 매우 민망한 말들을 막 해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한참 듣고 있던 그 미국인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학생들에게 다가와서는 하는 말,

“너희들 죽고 싶어?”

대학생들은 그 미국인이 한국말을 모르는 줄 알고 함부로 말을 해댔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미국인이 한국말을 전혀 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 대학생들에게 그 미국인이 아프리카 말로 막 욕을 해댔다면 그 학생들이 과연 기분 나빴을까요? 아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쟤 왜 저러냐?”

하면서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마음속에 경험으로 자리 잡아 ‘나’를 형성합니다.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자라면서 교육을 통하여 배운 것이지 원래부터 우리가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허상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남들로부터 욕을 들으면 듣는 즉시 그 말을 해석합니다. 그것이 한국말이라면 우리가 아는 말이기 때문에 즉석에서 해석하여 감정이 작용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싸우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때 만약 우리가 한국말을 몰랐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말을 모르는 어린애들에게 욕을 해 보십시오. 그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교실에 학생이 50명이 있는데, 그 중에 누군가가 “철수, 개새끼!”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과연 누가 기분 나쁠까요? 철수라는 아이만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러면 50명이 다 철수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전부 다 기분 나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무도 기분 나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이름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라, 편의상 임시적으로 붙여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야 바꾸면 됩니다. 이름은 변치 않는 실체가 아닙니다. 이름은 이름이고 나는 나입니다. 이름도 하나의 경험입니다. 누가 지어주지도 않고 불러주지도 않았다면 나는 이름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름은 단지 경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울 속의 그림자 때문에 왜 거울이 상처받아야 하나요? 경험의 집합체인 ‘나’ 때문에 왜 우리의 본질인 ‘생명’이 상처를 받아야 하나요? 절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은 ‘나(에고)’를 우리의 본질로 착각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이것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욕 한 마디면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질이 ‘생명(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경험의 집합체인 ‘나’를 본질로 알고 살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마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매일매일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자기 집에 누군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열어 주지 않습니다. 안 그런가요? 그런데 우리는 누가 욕을 하든 자신의 마음의 대문을 활짝 열어 두고 아무나 들어올 수 있도록 놔두고 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원하지 않는 욕은 절대 받아주지 마십시오! 원치 않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듯이.

 

요컨대, 어떤 상황에서 언어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그 즉시 자신의 마음의 아픔을 관조하면서 그 아픔의 원인이 자신의 허상인 경험의 집합체, 즉 ‘나’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그러면 그 아픔에서 곧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잠시 마음은 아플 것입니다. 주먹으로 상대를 한방 치고 싶은데 그것을 참고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그 아픔을 삭인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길 때 냄새가 지독하듯, ‘나’의 껍질을 벗기는 과정도 고통이라는 냄새를 거쳐야 합니다.

“어휴, 열 받어!”

그 마음을 인내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과 인내를 통해서 ‘나(에고)’는 서서히 죽어갑니다. ‘나’의 인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만한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는 열매가 열리지 않는 법입니다.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