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제6회
나는 정승 집 머슴의 마누라였다
며칠 전에 이사를 했다. 옛날에 살던 집이어서, 그리고 안방을 내 짐으로 채워두었던 터라 그리 낯 갈이를 하지 않아도 족했다. 3년만의 귀환이고 집을 비울 그때에 이미 예정 되었던 터라 고향에 들어온 기분이다. 아래층엔 내가 양장점을 하던 인테리어며 잡다한 기구들이 그대로 보관 돼 있어서 더욱 친숙하다. 세를 달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미련이 남아서 박절하게 거절을 하곤 했다. 지금도 문만 열어놓으면 손님을 받을 수 있겠다만, 이 시국에 누가 옷을 맞추러 양장점을 찾을까 보냐.
그래도 한 때는 잘 나가는 디자이너로 제법 많은 손님을 두고 있었지만, 그건 ‘왕년의 금송아지’격이다. 그래도 그때가 그리워 가끔 셔터를 올려놓고 망중한(忙中閑)이 되기도 한다. 무료(無聊)하고 지루하고 덧없을 때에는, 공연히 멀쩡한 옷을 오려서 되 박음질을 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것도 복이라고 귀가하는 아이들에게 들켜 듣기 싫은 소리를 듣곤 한다. 제발 이젠 그만 하라고. 지금 엄마가 바느질을 하면 자식들 욕 먹이는 일이라 한다. 설마~.
02학번으로 컴퍼스를 누볐으니 족히 7년 전의 일이구먼. 그래도 짭짤한 벌이였는데 그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수능시험을 대비해서 3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EBS방송을 경청할 때면, 지나가던 단골손님이 문을 열고는 정신 차리라고 냅다 소리를 지르곤 했다. 설마 수능시험을 준비하리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손자 같은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서 수능시험을 치르고 학부생이 돼서, 그래 어찌 됐는데. 겨우 졸업하고 일 년 강사로 뛰니까 ‘식도암’이라잖아~.
그랬으면 구구로 들어앉을 것이지 뭔 미련이 있을꼬. 오늘 아들의 바지에 새 지퍼를 갈아주고는, 다시 망중한이 되어 옛날을 그리니 하는 말이다. 뭐가? 내가 뭐 어때서? 밥 잘 먹고 산에도 잘 오르고 모임에도 잘 나가고. 이만하면 원위치도 가능한 거 아녀? 며느리가 밥을 하라 해서 걱정인가 설거지를 하라 하는가. 청소도 해 주겠다 세탁기도 아니, 영감의 밥까지도 며느리가 챙기는데 뭘 못 해. 가위질에 먼지 난다고? 마스크하면 되잖남? 힘들면 문 닫고 쉰다 하면 누가 나무라리. 벌이가 시원찮다고 쪽박 깰 위인은 또 어디 있냐고.
원래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성미다. 동시에 두어 가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TV를 보면서 마늘을 깐다든가 연속극을 보면서 발목운동을 한다든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도 고구마 줄기라도 벗겨야 하니……. 누가 그러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어째서 손수 제 신상을 볶느냐는 말이지. 아, 단 한 가지. 티 ‧ 타임만은 다른 일을 섞지 않는다. 특히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철저하게 지킨다. 커피는 맛으로 마신다기 보다, 그윽한 향을 음미한다는 데에 더 큰 뜻을 두기 때문이다.
으하하. 그러고 보면 나는 전생(前生)에 ‘정승 집 머슴’이었던가 보다. 일을 만들어서 하니 말이다. 아니면 일을 찾아다니는 꼴을 봐서는, 머슴은 그만두고 그 마누라였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잠 좀 실컷 잤으면 좋겠다.”
“아무 걱정 없이 네 날개 펴고 쉬어 봤으면 좋겠다.”하지 않았나? 그랬으면 실컷 자거나 날개 펴고 쉬지. 누가 뭐래? 또 정승 집 머슴의 마누라가 되고 싶은 이유는 뭣이냔 말이다. 이것도 살아있음의 한 여유란 말씀이야? 죽으면 실컷 자고, 죽으면 날개 펴고 쉴 것을…… 싶은 겨? 에이~. 제기랄. 꼭 금방 죽을 사람 같구먼. 난, 오래 살고 싶고 명의도 오래 산다 하지 않았는가 벼. 벽에다 뭔 칠을 해도 오래 살고프니 우리 영감 큰 일 났구먼. 킥킥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