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제2회
나는 살고 싶다.
2008년 6월 13일의 금요일. 그 재수 없다는 금요일의 13일에 나는 \'틀림없는 식도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나는 절대로 암이 아니라고 우길 기운도 없었다. 39kg의 체중이 아니라 해도, 내가 무슨 재간으로 의학적 전문지식을 들먹거리며 그들에게 대응이라도 해 보겠는가. 의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야지. 그래도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들이 처음에 이건 암이라고 또는 암이 아니라고 접전을 벌렸다면, 이건 틀림없는 초기일 것이다. 아니면 이제 시작이거나. 아무튼 21세기 최첨단을 걷는 지금 그까짓 암쯤이야. 더욱이 초기인 데에야. 기분은 좀 언짢지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억지로라도 그쪽으로 몰아가고 싶었다.
오늘은 남편도 아들도 출근을 하지 못했다. 막내 딸아이도 강의를 캔슬하고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내 피붙이가 무슨 일이 손에 잡히겠는가. 숨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건강해서, 적어도 내 아이들에겐 걱정덩어리가 되지 않기를 기도했는데. 젠장~, 이게 뭐람. 벌써 이 나이에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누를 끼치다니……. 상황으로 보아서야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그러나 몸의 기운이 열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큰아들은 담배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고 남편은 복도를 서성거리다가 간간히 열려진 문으로 나를 눈에 담는 게 보였다. 이 사람들이……! 의사에게 불려갔으면 들은 이야기를 내게도 들려줘야 하지 않는가. 혹시 몇 달을 못 넘긴다고 했으려나? 눈을 감고 나는 상상이 뻗칠 수 있는 데까지 더듬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막내 딸아이는 어미가 자는가 싶어서 팔을 살짝 쥐어보는 모양이었다. 내가 눈을 뜨자 아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조금 늦는대요.”
할 말이 없는지 이미 알려 준 사실을 다시 읊는다.
잠시 뒤 딸아이가 마주잡은 제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엄마.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제는 엄마가 병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셔야 하고, 그래서 엄마가 제대로 대응해야 해요. 그래서 말인데…….”
아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엄마. 3기에서 4기로 접어들고 있대요.”
요런, 요런. 영악스럽다 못해 잔인한 년. 그렇기로 어미한테 그리 말해야 하는가. 남보다 월등하게 더 많이 배운 년의 화법은 이래야 하는가 말이다. 왜 에미 맘은 헤아리지를 못하는가.
“아니, 40년 동안 날 검진한 내과의 녀석은 3기 4기가 되도록 뭘 했대?”
아마도 힘 없는 내 눈은 그러나 원망이 가득했으리라.
“식도암이라는 게 그렇다네요. 발견도 어렵고 진행이 빨리…….”
“그래서 수술은 할 수 있대? 수술도 못한대?”
“이제부터 그걸 알아본대요.”
“뭘 어떻게.”
“이런 경우엔 이미 임파선까지를 침범했다고 본다더라구요. 그러면 수술이…….”
점점. 하는 말 따위 하고는. 냉정한 딸년의 전언(傳言)에 소름이 끼쳤다.
이젠 정말 살고 싶은 생각 밖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나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누군데. 내가 죽으면, 내가 없어지면 우리 집 꼴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생전의 시어머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너는 우리 집 기둥’이라고. 아직 혼사를 못 치룬 아이들이 셋이나 되는데……. 적어도 아이들 끈은 붙여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드라도 내가 하여야 할 일은 많았다. 하고 싶은 일이 많기에 나는 58살의 02학번으로 늦각기 대학생이 되기도 하지 않았는가. 이제 겨우 4 년여의 캠퍼스 생활을 끝내고 학사로 졸업을 했다. 그리고는 복지관을 돌며 일 년여를 잘 나가는 강사로 살지 않았는가 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내 강의를 고대하고 있는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대로 죽어갈 수가 있느냐는 말이지.
살아야 했다. 꼭 살아야만 했다.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내 식도암은 이미 3기를 지나 4기로 들어간다 하지 않았는가. 자~. 이제는 어쩐다? 막내 딸년 말대로라면 내가 이겨내야 한다지 않은가. 내가 그럴 힘이 있을까? 암덩어리가 득실거린다는 이 작아진 몰골 어디에 그런 힘이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