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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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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살구~


BY 엠파이어 2009-06-30

 

 

“어머니 저 막내에요. 날이 너무 더운데 잘 지내셨어요?”

“나야 그냥 잘 지내지.. 너희들은 무고하냐?”

“그럼요. 아범은 늘 바쁘고, 성이는 시합하고 운동하느라 바쁘고요, 

진이도 시험 준비 하느라 바빠요 ”

“그래 몸 성해야 뭐든 바쁘게 하니 몸들 건강해라”

“네 어머니. 요즘은 뭐 하시면서 시간 보내세요?”

“요즘은 살구 주워 먹느라 바쁘다”

“살구가 열었어요? 그 때 아범이랑 아주버님들이랑 심은 그 나무에서요?”

“그래 생기기는 그래도 먹을 만하다”

“어머니~ 저도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이번 주에 내려와라”

“저도 가고 싶어요. 그런데 어머니 이번 주에 제가 교육이 있어요.

 다음 주에나 갈까 하는데요”

“그러면 내가 이번 일요일에 네 큰시누이가 온다고 해서 따라가려고 한다.

네 몫도 들고 갈테니 서울서 보자”

금요일 퇴근하면서 시어머니와 통화한 내용입니다.

전 일요일 오후 늦게 올라오시는 시누이 시간에 맞춰 어제 오후

아들은 기숙사에 들여보내고 오늘부터 있을 시험에 딸아이는 공부하라고 집에 남겨두고

신림동 시누이 댁에 남편과 갔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취나물, 살구, 양파 등 어머니께서 오셨다는 흔적들이 저를 반겼습니다.

손을 붙잡고 인사를 하고 더운 여름 불청객 되지 않으려고(아이들의 저녁도 챙길 겸)

저녁을 먹고 간 저희는 어머니표 살구를 맛나게 먹었습니다.

남편과 전 과일을 좋아합니다.

하물며 무더운 이 여름, 분명 어머니는 송글송글이 아니라 등줄기로 땀이 쭈르룩 흐를 정도의

더위를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따고 줍고 했을 살구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살구를 처음 구경하고 맛보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먹었습니다.

큰 시누이는 나물 좋아하는 막내네 주신다며 어머니께서 땀을 흘려가며

취나물의 연한 것들을 가져오셨다는 것과

시골 거 귀한 줄 알고 먹는 막내동서라며 싸주셨다는 형님표 양파(보라색/ 흰색)의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이 더운 여름 저희 큰 시누이 집에는 작은 아들 내외와 태어난 지 한 달된 셋째를 포함해

 6명이 사는 그리 크지 않은 아파트인데...

여름을 지나고 집에 가신다는 겁니다.

거기서 조금 지내시다가 저희 집에서 조

또 작은 딸 집에서도 조금 지내시다 보면 여름 두 달 금방 가려니 하시는데...

혹시 형님과의 문제가 있으신 건지...

아님 아주버님, 형님 모두 일하느라 바쁘셔서 함께 할 시간이 없으셔서

외로움을 비키시려고 오신건지....

많은 생각이 머리 속에서 회전을 하는데

꼬맹이들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간다고 하십니다

아무래도 올 봄 아버님을 먼저 보내시고  외로움을 타시나 봅니다.

시누이에게도 조카며느리에게도 큰 짐을 맡긴 것 같아 맘이 편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

누구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만

전.. 시어머니가 가엾습니다.

가난한 집으로 꽃다운 나이에 시집오셔서 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늙어진 육체엔 피곤함이 고랑처럼 파여 있습니다.

시집와 8남매를 낳으셨는데 가운데 둘은 잃으셨고 특히 막내인 남편을 낳을 무렵엔

먹고 살기 힘들어 배불러서도 광주리 이고 다니시면서 과일장사를 하셨는데

좋아하시는 과일 파시려고 못 드시고, 남은 건 자식 주느라 못 드시고...

처한 환경이 딱한 걸 안 단골이 고개 넘어 자식 없이 사시는 부부를 소개시켜 주셔서

막내를 낳아서 주신다고 하셨답니다.

산달에도 쉴 수 없는 형편이라 장사 나가셨다가 돌아오는 길

산통이 시작되었는데 길에서 낳을 수 없어 오는 중간 중간 아이 머리를 밀어 집어넣으시면서

두 시간 여를 걸어 오셔서 방에 들어가시자마자 남편을 낳으셨다는군요.

태어난 후 머리에 커다란 혹을 갖고 띠를 두른 아이 (피멍이 들어서..)를 안고 우시면서

“배고파 죽어도 같이 죽자. 널 보내고 어찌 살랴...” 하셨답니다. 

그 후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고 어려운 살림에 일찍 철난 아들 딸들 모두에게도

배움은 호사였나 봅니다.

큰 아들과 두 딸들은 서울로 돈 벌러 나갔고 작은 아들은 남의 집 머슴으로

남은 셋째와 막내 아들만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도 큰 형이 그래도 중학교는 다녀야

비료 푸대에 있는 영어 글씨는 읽어야 농사라도 짓는다는 주장 때문에 혜택을 받게 된 거랍니다.

그 후 셋째 아들 역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벌이를 위해 집을 나갔고

막내인 저희 남편, 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대로 있으면 가난을 못 벗어 날거라는 생각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행을 결심했다는군요.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취직을 하고 대학원(석사과정, 박사과정) 공부를 하는 동안

혼자서 해결하느라 고생한 남편 생각에 박사학위를 따던 날

저희 시어머니 엉엉 우셨습니다.

“못 먹이고 못 입히고 공부하러 서울 간다고 욕을 했는데

사람들에게 말하니 박사되는 게 힘들다던데 부모가 해준 거 없이 고생시켜서

우리 아들 미안해서 어쩐다니... 어쩐다니...“

박사과정 일 때 시부모님은 큰 아들을 잃으셨습니다.

그 충격에 어머님 쓰러지셔서 풍으로 몇 년 간 힘든 시기를 보내셨는데

워낙 강하신 분이라 이대로 있으면 자식들 고생시키신다고 열심히 재활치료 열심히 하셔서

85%정도 회복을 하셨습니다.

그 후 어머님의 막내아들은 몇 번의 고배를 마시기는 했지만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에 교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