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키우는’재미 (타고북스 刊)에서 발췌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내가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지 어느덧 20년하고도 두 해가 흘렀다. 가정을 이루어 아들을 낳고 키울 때는, 아이 돌보랴 출근하랴 살림하랴 매일같이 팽이처럼 돌며 정신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아들이 다 커서 의젓한 대학생이 되고 보니 드나나나 그림자처럼 남은 것은 남편 한 사람뿐. 이제는 그런 남편을 기둥처럼 믿고, 그런 남편과 연인처럼 속삭이고, 또 그런 남편을 ‘아이’처럼 키우는 재미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다.
평생을 기자로, 작가로‘밥벌이’를 하는 남편은 마음이 너그러우면서도 온몸에 유머가 가득 찬 재미나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의 몸 한구석에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과 ‘게으름’도 흠씬 배어 있어 밉살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몇 년 전에 높은 자리로 승진한 남편은 밖에서는 위엄을 세우는 점잖고 멋진 양반이지만, 집에만 돌아오면 완전히 그 틀에서 벗어난 우리 집의‘큰 아이’로 변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는 위엄있는 남편의 부인 역할에 충실하지만, 우리 둘만의 세계인 집에 돌아오면 우쭐거리는 남편을 어르고 달래고 훈계하고 교육하느라 바빠‘짜증’이 날 지경이다.
멋쟁이로 키우기
어렸을 때 남편은 학교에서 신체 위생 검사하는 날이면 한쪽 발만 살짝 씻고 가서는 그 씻은 발만 슬쩍 벗어 보이고 검사에 통과했다고 하는데, 게으르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내가 재촉하지 않으면 남편은 열흘이고 보름이고 머리 감을 생각을 안 한다. 내가 억지로 화장실로 끌고 가서 대야에 머리를 갖다대고 샴푸를 발라주어야만 마지못해 머리를 긁적인다. 내가 머리를 감으라고 재촉할 때마다“벌써? 내일 감으면 안 돼?”하며 계속 미루고 버티니 언제나 강제로 씻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거짓말 같지만, 결혼하여 여태까지 남편이 제 손으로 옷 한 벌, 양말 한 짝 씻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여보, 대학 다닐 때에는 어떻게 옷을 씻어 입었어요?” 내가 하도 궁금해 이렇게 물어보면, 남편은 겉옷은 가끔가다 후배들이 씻어주고 속옷과 양말 같은 것은 아주 더러워지면 교정의 어스레한 곳을 찾아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어이없고 한심한 사람이다. 남편이 이러하니 나는 그이의 옷차림에도 각별히 신경을 쓴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꼭 내가 정한 옷을 입게 하 고는 체조를 시키듯 두 팔을 벌리게 하여 양쪽 겨드랑이에 향수까지 뿌려준다. 이제 습관이 된 남편은 내가 미처 옷을 정하지 못한 때면, “오늘은 뭘 입을까요?”하면서 어린아이처럼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래서 어쩌다 남편과 다투고 서로 다른 방에서 잠을 자도 이튿날 아침이면 남편의 구두를 닦아주고 그날 입을 옷을 챙겨주는 일만은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집에서 대접받는 사람이 밖에 나가서도 대접받는다는 삶의 이치를 깨달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남편을 반듯하게 차려 입혀 내놓으면 그 아내도 칭찬받기 마련이니‘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날마다 내 손으로 만들어낸‘멋쟁이’남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상쾌하다.
가정적인 남편으로 키우기
우리 집 책장에는 책만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장 유리에 손바닥만 한 종이쪽지나 신문지 조각이 군데군데 붙어 있어 언뜻 보면 아이들 놀이방 같기도 하다. 그 종이 조각들은 내가 남편을‘훈계’하려고 책장에 설치한‘벽보’이다. 나는 워낙 가정적인 성격이라 신문이나 잡지 같은 것을 봐도 가정생활을 다룬 기사만 골라보고, 마음에 드는 글은 가위로 오려서‘소장’도 해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글을 남편에게 자주 보게 하면 뭔가‘교육’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신문이나 잡지, 책을 보다가 마음에 와 닿는 글이 보이면 예전처럼‘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눈길이 가장 많이 가는 책장 유리에 붙여 놓았다. 짧은 글은 그대로, 긴 글은 나무곁가지 치듯 살짝살짝 잘라내서 한눈에 보기 좋게 편집을 하기도 했다. ‘화목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 ‘부부 사랑 키우기’, ‘가장의 책임’, ‘자식과 부모’등등 여하튼 교육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글은 눈에 띄는 족족 오리거나 베껴 붙였다. 그래서‘벽보’가 빠를 때는 하루에 한 번 바뀌고, 늦을 때는 사흘에 한 번, 일주일이나 보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바뀌었다. 처음에 남편은 그 종이 쪽지를 보고 어리둥절하여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읽는 둥 마는 둥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런 남편을 억지로 붙잡아다 책장 앞에 세워놓고 읽게 했다. 다음날에도 벌을 주듯 그렇게‘벽보’를 보게 했고, 그 다음날에는 아침에 출근할 때 한 번, 저녁에 퇴근해서 한 번 소리내어 읽게 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차츰‘벽보’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집에만 돌아오면 새로운 글이 붙어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슬금슬금‘벽보’앞으로 잘도 다가선다. 심지어 ‘벽보’가 며칠이 지나도 바뀌지 않으면“요즘은 벽보 편집자가 꽤나 게으르군”하며 투덜대기도 한다. 나는 날마다 우리 집‘벽보’를 열심히 애독하는 남편이 더 없이‘기특’하다.
‘멍청이’남편과 놀아주기
나는 엄마가 된 뒤에도 어린 시절에 어지간히 즐겨 했던 숨바꼭질을 아들아이와 계속했다. 좁은 방안에서 상대방을 찾아 내기는 아주 쉬웠지만, 아들과 나는 숨바꼭질에 열을 올려 가끔 방안을 발칵 뒤집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들이 외지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자, 나는 아들 자리에 은근히 남편을 끌어들였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오는 기척이 나면, 나는 부랴부랴 문 뒤나 베란다에 숨었다가 남편이 두리번거릴 때 갑자기 뛰쳐나와 남편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요절복통할 일이 생겼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은 내게 톡톡히‘보복’하려고 단단히 숨어버렸다. 그런 줄도 모른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부엌으로 가 솥에 쌀을 안치고 채소를 다듬으며 내 할 일만 했다. 그런데 밥상까지 차려놓아도 진작 와야 할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급해진 나는 남편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아, 휴대폰 소리가 침대 밑에서 울릴 줄이야! 내가 어리둥절하여 황소눈이 되어 있는데, 침대 밑에서 남편이 온몸이 땀에 축축하게 젖고 먼지까지 뒤집어쓴 채 기신기신 기어 나왔다. 양손에 신발을 한 짝씩 들고서 말이다.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 신발은 놔두고 숨었어야 집에 돌아온 줄 알지!” 남편은 가끔 이렇게 엉뚱한 짓을 벌여 나를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한다. 이럴 때 보면 남편은 딱‘천진한 어린아이’이다. 그러니 내가 우리 집‘큰아이’와 즐겁게 놀아주려고 가끔은 극본도 쓰고 연출도 할 수밖에.
사랑한다고 말해봐요!
남녀가 사랑을 표현할 때 남자들이 추상적이라면 여자들은 구체적이고, 또 남자들이 시각적이라면 여자들은 청각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흔히 아내들의 경우는, 남편이 달콤한 키스를 해주거나“사랑해요!”,“ 예뻐요!”같은 말을 자주 해주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런데 내 남편은 돈도 안 드는 이런‘사랑 표현’에 인색할 정도로‘깍쟁이’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거꾸로 내가 더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에게 먼저 다가가서‘뽀뽀’도 해주고, 출근하는 남편에게는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에는 서운한 생각도 파고든다. 내가 이렇게 애쓰는데도 눈치가 없는 남편은 달이 가고 해가 가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사랑 표현’을 받기만 하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밥을 먹고서 둘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때마침 한 젊은 부부가 조용한 교실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왔다. 젊은 아내가 남편의 팔을 흔들며“나를 사랑해요?”라고 묻자, 그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만 썩썩 긁었다. 그래서 젊은 아내가“나를 사랑하냐고요?”라고 재차 묻자, 그 남편이“꼭 말로 해야 하오?”라고 묻더니 뒤이어“당신을 사랑해!”라고 외쳤다. 그 말에 신이 난 젊은 아내는 칠판 앞으로 남편을 끌고 가더니 기어이 방금 한말을 칠판에 적어 보란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옆에 있는 남편에게“나를 사랑해요?”라고 따지고 들었다. 그랬더니 남편은“그럼 칠판을 내놓아요. 내 거기다 써주지”하고 엉뚱한 소리만 할 뿐 기어이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만 기분이 잡쳐 쌀쌀맞게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때 남편이“하기야 우리 집에도 칠판이 있지”하면서 씩 웃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리둥절해하니 남편은 자기 가슴을 두드리면서 “칠판이 여기 있소”라고 소리쳤다. 그 말 한 마디에 내 가슴이 뭉클해졌다. 과연 남편의 가슴에는 진작부터‘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도 우리가 처음 가정을 꾸린 그날부터 분필이 아닌 심장의 맥박으로 또박또박 새겨진 것이다.
이제까지 아내인 내가 남편을‘키운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돌이켜보니 나 역시 아버지 같은 남편의 품에서 갈수록 철이 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