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자란 것이 복일 수는 있었지만 힘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나 나이만큼의 고민은 있었고 아픔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모두 엄살일 뿐인 아픔에 불과했다.
제대로 부대끼며 견뎌내야 할 삶은 어른이 되면서 기다렸다는 듯 속속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라구! 이게 진짜야.
그동안 맛본 고독이나 아픔?
흥, 그건 허황되기 짝이 없는 제 멋에 취한 속물적인 감상들에 불과하다구.
자, 어서 오라구.
제법 오래 기다렸어.
산다는 게 정말 어떤 건지 확실히 깨닫게 해 주겠어.
피할 길이 없었다.
운명이란 것, 자석에 이끌리듯 옴짝달싹 못하게 나를 집어 삼켰다.
그 아가리에 내 삶을 꼬라박았다.
앗, 뜨거라.
어찌나 뜨겁게 느껴지던지 인내할 수가 없었다.
맷집이 약했기에 같은 아픔도 더 예민한 감각으로 느껴졌다.
소리소리 질렀다.
저 정도도 못 참아 하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아픔에 울부짖는 내가 가짜는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발을 뺐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건 애초에 운명도 아니었으리라.
질긴 운명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 내 몫은 기나 긴 인고의 세월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웠다.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에 진땀을 바가지로 흘렀다.
눈물이 마르면서 나는 냉정해졌다.
깊이 깊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사람이 달라졌다.
달라진 나를 확인하는 타인의 눈빛을 깨닫게 될 때 초라했다.
아주 많이 초라했다.
그래서 차라리 웃었다.
들썩이는 내 어깨는 뒤에서 보면 울음이었다.
마음을 속이지 않고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 나았을까.
잠시 견디기엔 더 편한 길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랬다면 나는 무너졌을 것이다.
울기보다 웃기가 훨씬 더 어렵고 외로웠음을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나조차도 나를 모르는데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어루만져주는 단 한 마음이라도 있었으면.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투명하게 나를 들여다 볼 준비가.
가까스로 아물어가는 상처들이 덧날까 무섭다.
조금만 더.
멀지 않은 느낌이다.
상처가 흉터로 남아 너덜거리더라도 아프지 않은 눈길로 토닥거릴 수 있는 날이.
기어이 운명까지 사랑할 수 있는 날이.
그 날을 가장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나, 나,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