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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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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쉼표,


BY 바다새 2009-04-14

노란쉼표,

 

봄의 처음은 노랗게 시작되었다.

개나리와 산수유가 첫손님이었고, 산마다 노랑제비꽃, 양지꽃, 논둑에 애기똥풀도 노란빛이다.

학교 앞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봄볕 따라 노랗게 쏟아졌다. 고사리 손에 갓 부화된  생명이 단돈 몇 백 원에 팔아넘겨지던 날도 병아리는 노란 졸음 꾸벅거렸다.     

살아있는 장난감이 되어 손이타고 금세 죽어지게 될 사실 앞에 움찔 소름이 돋았다.

남아있어야 할 기본의 가치마저 사라진 시대에 나와 내 아이들이 산다.


노란색 지천이던 그해 봄날.

집 근처 은행 다녀오다가 화원 앞에 늘어선 꽃들을 본다.

이름도 제각기이고 꽃 대궁 치켜 올린 눈 꼬리도 가지각색이다. 차마 부끄러워 고개 숙인 여린 잎이 있는가 하면, 기세 좋게 만개하여 하늘을 빨아들일 듯 도도한 자태도 있다.   

눈요기나 실컷해보자는 속셈으로 기웃거렸다. 컴퓨터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주인이 슬금슬금 걸어 나온다.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었겠지.

젖은 물이끼 한 조각이라도 팔아보겠다는 심산이었나 보다.

뭘 찾으시냐고 친절하다. 멋쩍게 웃다가 괜히 꽃 이름만 잔뜩 물어봤다. 표정에 조금씩 짜증이 묻어나는 느낌이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거나 집어 들자. 비좁은 구석 돌로 된 소구유 곁에 머리 조아린 노란 꽃을 가리켰다. 알려주지 않아도 녀석의 이름은 내가 안다. 노란 수선화.

 


하얀 목련이 필 때 면의 가수 양희은이 불러주던 노래 속 일곱 송이 수선화를 기억한다. 오래 된 카세트 테이프가 늙어지도록 되감아 들었다.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를 당신께 드리겠다는 아름답기만 한 노랫말.

저만치 일곱 개의 별을 가슴에 안고 꿈에 그리던 아련한 사랑이 달려 올 듯한 감상이었지.

거실 탁자위에 올려놓은 수선화 화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봄날 하루를 다 삼켜버렸다.

퇴근하여 돌아온 남편은 카메라렌즈 번갈아 끼우며 수선화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빛의 각도이며 초점에만 열을 올리며 신경 쓰느라 아내의 은밀한 사랑바라기를 눈치 채지 못했다. 수선화 꽃잎 속에 퍼 올리던 첫사랑남자 이름까지 살짝 숨겨둔 사실도 모르더라.


노란수선화 허전하게 바라보다 별생각이 다 든다.

무엇이든 내 나이 불혹이면 보게 될 줄 알았다. 희미하기만 했던 꿈도 이상도 뚜렷해질 것이라 여겼다.

난관이라 이름 붙여질 만한 혹 덩이가 생겨도 사십까지만 참자 속말하였었다.    

허나, 나이 먹는 다는 것은 포기를 배우는 일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헛되이 채우려던 욕심과 부풀려지기만 거듭하여 온 꿈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나이 먹음이다.

앞으로 사십년을 더 산다 하여도 마냥 버리고 비우며 포기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다.

인생 평균 팔십을 산다고 보았을 때, 나는 꼭 중간쯤에 걸쳐있다.

비단 나른한 봄기운 탓만은 아니다. 여기 이곳! 큰 쉼표하나 찍어두고 싶은 시점이다.

쫓기듯 달려온 삶도 그러하거니와 기계로 여겨봐도 손 볼 곳이 점점 늘어간다. 지쳤다는 얘기다.

휴식 없이 달려온 삶에 누군가 옐로우 카드라도 내밀어 주었으면 싶다. 노란 경고장 내밀며 당장 쉬지 않으면 곧 인생운동장에서 퇴장시킨다는.

하늘도 우러르고 풀냄새도 코끝에 머물게 하라며 엄중한 심판의 경고를 받았으면 한다.


쉼표는 또 다른 시작이다.

달리던 차가 황색신호등 앞에서 멈추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무리하여 속력을 대다보면 아찔한 순간과 부딪힌다.

다음신호 기다리며 노란경고를 여유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곧 있어질 초록의 순탄대로를 기대하며 잠시 머물 줄도 알아야 하는 거다.

지금 나의 곳곳에 노란색들이 번쩍거리고 난리법석이다.

그리하여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용기 내어 말한다.

 

나, 마른 가슴에 노란쉼표 하나 찍어둘래!

이렇게!   ,


2009년 4월 13일 밤에 노란수선화 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