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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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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소리(2)


BY 오월 2009-02-25

며칠 전 출근을 해 보니 남편 책상위에 봉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뭘까 궁금해서 들여다 보니 세상에 냉이가 한 봉지 가득입니다.

아마 머리가 하얀 살수차 기사님이 아내와 둘이서 봄들판을

헤매서 캐 오셨나 봅니다. 감사한 마음 가득 일단 냉장고에

넣어두고 2틀이 지났습니다.

 

오늘 출근해 사무실에 딸려있는 주방문을 여니 씽크대 위에

봉지 하나가 보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냉입니다.

육류나 생선을 먹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아마 그 살수차 기사님이

또 가져 오셨나 봅니다.

 

저번에 넣어둔 냉이까지 꺼내 살펴보다 역시 깨달음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냉이를 캤느냐에 따라 냉이 뿌리의 굵기가 다릅니다.

한 봉지는 희고 굵고 긴 뿌리가 봄처녀도 아닌 내 가슴에 순간

떠오르는 기억하나를 상가시키며 설레게 합니다

 

어린 날 까맣고 삐적 말라 마른 꼬장물 쫄쫄 흘리며 다니든 초등학교

근처에 시골처녀 답지않게 뽀얀 피부를 가진 언니가 누군지 알순

없지만 어린 아이 하나를 등에업고 우리들이 지나는 길목에 서 있곤

했는데 그 언니 치마 밑으로 보이든 유난히 흰 다리가 어쩜 어린

기집애의 가슴속에 두고두고 부러움이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묻은 흙들을 살살 씻어내니 뽀얀 살들이 보입니다

살폿이 보일 듯 말듯 사람 애간장을 녹이는 앞가슴 고운 흰살무덤

나도 몰래 자꾸만 눈길이 머물던 그 기억 속으로 냉이의 길고 흰

각선미를 보며 나른한 봄의 한 상념에 잠시 젖어 봅니다.

 

뿌리가 길고 굵은 봉지의 냉이들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서

새콤달콤 초무침을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유난히 냉이 초무침을

좋아하는 딸아이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고 그립습니다.

뿌리가 짧고 가늘고 여린 봉지의 냉이들은 된장찌게를 끓였습니다.

노릇하게 머리째 아! 그 대가리? 우리집 강아지들 먹일려고 통째로

고등어 자반을 구웠습니다. 한 상 차려진 점심상  단단한 땅을 뚫고

그 튼실한 뿌리를 키워내고 제일먼저 파란 잎을 틔워낸 냉이는

 

분명 이 봄 우리들에게 불끈 힘을 줄거라 생각이 듭니다.

밥상위에 젓가락들이 분주합니다.

노릇노릇 고등어 자반도 먹어야 하고 새콤달콤 냉이 무침도 먹어야 하고

칼칼하고 구수한 된장찌게도 먹어야 하고.....

 

\"밥 좀 더주세요\"

앗싸 성공입니다

살아가다 만약 내가 힘들어져 누구네집 주방 설거지 하는 날이 온데도

이런 경험들은 그래도 남들에게 조금은 더 쓸모있는 인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잘 살아낸거 같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내가 이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인간이 되어 갑니다.

앗싸 내가 한 밥이 맛있다며 더 달라고 했습니다.

난 너무 기쁘고 더불어 사는 기쁨을 봄 햇살만큼 가슴에 품어 봅니다.

아!역시 남자들은 희고 긴 각선미를 가진 것들을 좋아한다는

다 아는 진실을 찐하게 확인하는 하루입니다.

뾰족히 올라온 내 꽃밭의 새싹들은 내가 덮어준 검불 이불을 덮고

새근새근 잠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