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유류분 제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181

이건, 눈이 아니여!


BY 바다새 2008-12-22

 

이건, 눈이 아니여!

 


새벽세시쯤.

창문을 울리는 굉음에 잠이 깼다.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용기 내어 거실 베란다 쪽을 내다봤다.

세상에!

드디어 속초다운 겨울이 오고야 말았구나.

아파트 옥상에 쌓였던 눈덩이 들이 바람결에 한 덩이씩 떨어지면서 유리창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잠이 깨버린 눈꺼풀은 다시 붙을 생각을 않는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겨울가뭄이니 해서 물 부족현상을 얘기했건만.

제한급수가 곧 시작되겠거니 나름대로 걱정을 하던 터였다.

구멍 뚫린 하늘에서 시루떡을 안치려는지 쉴 새 없이 퍼붓는다.


예상했던 대로 스피커에서 학교마다 휴교령을 선포한다며 안내말씀을 드리겠단다.

두 아이들과 꼼짝없이 동굴 속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밖에 나가보긴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미 완만 경사를 이룬 눈의 능선 어디쯤에 내차는 묻히고 없었다.

무엇이 경계이고 구분이던가.

이럴 땐 죄다 한통속이 된듯하여 오히려 느슨해진다.

  

이것이 속초다.

적당히 대충, 얼렁뚱땅한 기후는 허락되지 않는, 한마디로 대쪽 같은 바다마을.

속초와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거센 기후. 그게 바람이다.

십여 년 살면서도 적응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속살거리며 불어대는 애교바람은 진짜배기 바람 축에 끼지도 못한다.

확실하게 날리고 쓸어버려야 직성이 풀린다.

이왕지사 붙은 바람인데 이름값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리에 나뒹구는 잡동사니들에 웬만한 살림도구들도 있고,

상점파라솔이니 천막까지 마구 쏟아진다.

공사장에서 날아온 판자를 맞고 내 자동차 지붕도 알루미늄 캔처럼 찌그러지기도  했었다.   

장하다, 속초바람!

부는 김에 집집에 골칫덩이들, 직장마다 암적인 존재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리기를.

 

두부찌개와 굴비구이로 점심을 차려먹고 밖으로 행차를 시도한다.

딸아이는 벌써 친구를 찾아 줄행랑을 쳐버렸다.

스키복으로 단단히 무장시킨 아들을 앞세워 현관문을 열었다.

발이 커져 못 신는 딸아이 분홍장화에 패션일관성(?)을 위해 분홍고무장갑을 꼈다.

헉! 몇 년 전 상황이다.

길이 없다.

누군가 걸어갔을 발자국 덧 밟고 경비실로 향했다.

눈삽을 빌리고 다시 주차장으로 왔는데, 이거야원 도무지 차를 못 찾겠다.

공동묘지 봉분들이 저러할까.

어림짐작으로 찾아내어 헤쳐 보니 내차가 맞네.

아들은 옆에 눈 더미 위에서 뒹굴며 난리가 났다.

두껍이집도 특대로 짓고 쌍 터널, 미시령터널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한 발 내딛기도 버거우니 거의 눈 더미에 묻혀서 신이 났다.

어미는 비지땀을 흘리며 삽질을 해대는데.

삼삼오오 가족들이 함께 깔깔대며 차에 붙은 눈덩이를 떼어내고 있었다. 

  

난 뭐야?

주말부부라고 얼씨구절씨구 자유부인선언하며 즐겼는데.

남편의 그 짧은 팔뚝이나마 아쉬운 대로 간절히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과부도 아닌 처지에 혼자 이 무슨 청승이냐.

키보다 높은 자동차지붕으로 삽을 올리며 안간힘 쓰려니 화딱지가 밀려왔다.

꼭 필요 할 땐 없군.

집안에 못 박고 전구 갈고 삽질 할 때 옆에 좀 있어주면 울매나 좋을꼬.

배고파 밥 생각나거나 등에 때 밀어 달라 할 때만 나를 찾지.

겨우 전화해서 하는 말이 차에 쌓인 눈 밤새 얼어버리니 꼭 치워야 돼 알았지?

너나 잘하세요!


흰 눈이 와서 낭만적이네,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는 말을 내 앞에서 하는 사람.

각오하시라!

삽질해 버릴 테니까.

군대 갔던 왕년에 내 애인-절대 현재 남편은 아님-

눈이 와서 좋다는 내 말에 쌍심지 켜며 연병장 눈 치울 생각하면 콱 죽어버리고 싶다더니. 그 심정 이제 알만하다.


딸아이 분홍장화 속으로 허락도 없이 들어온 눈덩이 땜에 발이시리다.

젖은 양말을 갈아 신고 남편 낚시장화로 바꿔 신었다.

젠장! 길이는 딱 좋은데, 헐렁거리고 무겁다.

대충 자동차지붕과 앞 유리, 몸체를 훑어내고 들어왔다.

젖은 옷과 점퍼를 세탁바구니에 던져놓고 이 글을 쓴다.

몸이 녹는지 스멀거리며 졸음이 쏟아진다.

삭신이 쑤시기 시작한다.


배고픈 시절.

쌓인 눈을 보며 저게 다 돈이었으면, 쌀이었으면 했다지.

음....., 난 무엇이기를 중얼거려볼까.


총각머슴들 한 트럭쯤이면 좋겠다고 해볼까나.


히~~~! 


2008년 12월 22일 폭설 속에서 살아남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