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흐리다.
쓰탱세숫대야에 먹물이 떨어진 모냥으로.
화선지에 스며드는 먹구름같은, 먹물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크리스마스 카드에도 먹구름 마아블링을, 딱 붙여 내가 찜했던, 녀석에게 카드를 보냈었다.
하얀얼굴의 그 녀석은 어디서 무얼하나?
신문 배달을 한다고, 동생을 책임진다고 해서, 어린 맘을 짜그라들게 했던...녀석
화선지에 스민 먹물 마아블링처럼 떠오른다.
아...
생각하면, 가슴이 오그라드는 이야기들...
이제는, 말을 해도 될까? 그 밤의 이야기를...
(나는, 그 이야길 하기 전에 또, 다른 쓸데없는 말을 할테지...멍충이.)
흐린 하늘을 바라보자니, 헛게 보인다. 쓸데없이...
연...
가끔, 나는 연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사는 모습이.
휭하게 뻥 뚫린 가슴을, 보란듯이 뵈며 든든하게 서서 날으는 방패연 말고,
앞이 뾰족하게 생기고, 길고, 어설픈 꼬리를 두루룩 달고, 날으는 가오리연같다는 생각.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위아래로 후룩거리고, 퍼덕거리며, 허우적 거리는 가오리연.
가끔은, 실 끊어진 연처럼 모양이 위태위태 하다.
가끔은, 나를 여며 쥔 실이 끊어져서, 멀리멀리 날아 가고 싶기도 하다.
가끔은, 나를 쥐고, 밝게 웃는,어린애의 미소가 아득하고, 참 멀게 느껴져서, 높은 곳의 바람이 아찔하다.
가끔은, 실에 발라진 매서운 유릿가루를 반짝이며, 연싸움을 해야 할때, 바둥거리며 눈을 감아버린다.
언젠가는, 너덜너덜 해져서는, 스르르 떨어질테지. 가오리연.
스르르 떨어지거나, 갑자기 뚝 떨어지거나, 알 수 없어요.
그때는, 그랬었다.
모두 불을 끄고, 세상을 깜깜하게 만드는, 훈련을 받았었다.
형제자매, 친구들... 우리는, 어렸다. 어른들은, 그때도 어른였다.
이불을, 폭 뒤집어 쓰면 아슬하면서도 은밀한 포근함은, 지금도 여전한데...
이제, 나도 어른이라고 불려진다. 훈련받으며 자란 어른.
두툼한 나이롱커튼을 야무지게 드리우고, 불이 꺼진다.
촛불이 켜지고 아이들은, 키득거리기 시작한다.
벽에 크게 만들어지는 그림자 놀이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비둘기가 둬마리 날고, 개가 입을 벌리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놀란다.
아버지가 만든 주전자 모양의 그림자가 너무 위대하여서...
작은 마을이므로, 골목마다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 불 꺼요! 불 꺼! \" 좀 두려운 울림였다.
지금은, \' 끄라면, 끄겠어요. 벗으라면 벗겠어요. \' 하는,
어떤 여배우의 능청스런 연기를 떠올리며, 웃지만 말이다.
그런데...
\" 불 꺼! \" 라는, 목소리가 참 여러차례 들렸다.
이윽고, 촛불마저 후후 불어 끄는 상황이 벌어졌다.
옆집, 앞집, 그 뒷집, 모두 촛불을 꺼버렸는지, 실오라기 같은 빛도 없어졌다.
\" 뭐야? 진짜, 전쟁야? 우린, 다 죽어버려? 전쟁하면? 방학 해? \"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도, 방학이 중요한 어린 멍충이였던 나였다.
잠시 조용해 지더니, 또 우렁차고, 짜증스럽게 내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 불, 끄란 말이야! 불, 꺼요! 불, 꺼! \"
온동네, 아이들의 그림자 놀이는 끝이 났다.
아이들이 버슬버슬 떠는, 소리가 들릴 지경으로 조용해졌다.
나중엔, 어른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더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전쟁이 터지거나, 말거나, 잠 들어 버렸다.
나는, 잠들면서, 삼득이 아저씨가 불을 켰나 보라고, 바보같은 어른이라고 여겼다.
군대도 못 가고, 학교도 안 갔던, 삼득이는 얼뜨기로 불려졌었다.
더하기빼기도 못하는, 삼득이 아저씨가 진지하게 말하길,
전쟁이 나면, 폭격기가 깜깜해서, 사람 안 사는 줄 알고, 폭탄을 안 뿌리게, 훈련 하는 것이라고.
아이들은, 그럴듯한 삼득이아저씨의 말에 끄덕이다가,
자신이 전투기조종사였다는 말에 기막혀 하며,
삼득이아저씨는 커서 뭐가 될런지 걱정해줬다. 착한 아이들.
삼득이 아저씨,폭격기, 쏟아지는 폭탄을 생각하다 잠들어 버렸을 착한 아이들의 밤은 깜깜했다.
아침이 오고, 아주머니들이 바쁘게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했다.
간 밤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괜히 김빠졌다.
몇날몇일이 지난후에 알았다.
그 밤에, 우리 마을에서 가장 잘 배운 아저씨가 돌아 가셨다는 것.
선생님을 하셨던 분였다.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둥그런 얼굴선이 떠오르는 그분이 돌아가셨단다.
심장마비 라고 했던가? 급작스럽게.
순수하게 훈련에 길들여진, 선생님의 부인은,
불을 끄라면 끄고, 다시 켜면서, 난리를 혼자 치뤄낸 것이다.
요즘 사람같으면, 뛰쳐나와서, 불 끄라고, 소리지르는 사람의 턱밑에, 촛불을 들이 댈 일이다.
\" 네가 뭔데 불을 끄라고 하냐? 사람, 목숨이 오락가락 한다 말이다! \" 할 것이다.
미련한 불 끄기... 길들여짐.
부인은, 전쟁을 치루고, 셋인가? 넷인가? 되는, 아들을 모두 잘 키워내셨다고 한다.
누구는, 화가가 됐다 하고, 의사가 된 아들도 있다하니...
선생님 부인은, 전쟁을 치룬 터에서, 불끈 일어 선 게다.
전쟁 속에서 더 악을 쓰며, 억세게 드세지는 존재는, 어미일 게다. 아마도...
어떤 나라에서는, 씨를 말린답시고, 여자들을 강간했단다. 빙신같은 존재들...남자.
그러나, 어미들은 그 아이들을 키워내고 있단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생김생김이 다른 혼혈아들은, 엄마에게 묻는 단다.
자신은 누굴 닮았냐고... 그럼, 엄마는 말 해준단다. 엄마를 닮았다고...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 하지만... 전쟁도 끝이 있더라.
아...
허망하다.
뚝 끊어져서 떨어진 것이다.
서서히 꺼지지 못하고 말이다.
끄다, 켜다, 부르르 떨다가... 영영 꺼지는 것.
오늘 하늘은, 먹물 마아블링 같다.
하늘을 보니 헛게 보인다.
나는, 연이 되어 축축한 공기 사이를 누비고 있다.
좀 있으면, 나를 바라보며, 씩 웃는 아이의 웃음이 멀리서 다가 올 것이다.
실을 당기며, 나를 당기며, 잠시 쉬게 해 줄 것이다.
자... 더 날자.
떨어지면... 끝이다.